나이가 들어가니 자꾸 옛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젊었을 때 어른들이 옛날 얘기를 자꾸 하면 공감도 되질 않고 왜 저러나 했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됩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매거진의 이름이 “58 개띠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곳에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이미 많이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1958년생 개띠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시작이고 내 유년시절에는 골목마다 학교마다 아이들이 무지막지하게 많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너무 열악하고 암울한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국민학교 다닐 때의 몇 가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와루바시와 통조림 깡통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에 내일의 준비물은 와루바시와 깡통이라고 수첩에 적으라 합니다.
와루바시는 나무젓가락입니다.
내일은 학교 뒷동산에서 송충이를 잡는 날입니다.
참 송충이가 많았습니다. 나뭇잎과 가지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송충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요.
털이 부숭부숭하고 징그러운 송충이를 나무젓가락으로 잡아 깡통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은 징그럽다며 우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단축수업을 하고 그렇게 온종일 송충이를 잡았습니다.
송충이를 잡다 보면 머리 위에, 옷 위에 그리고 손등에 이놈들이 떨어져 스멀스멀 기어 다녀 몇 번을 기겁을 했는지 모릅니다.
쥐꼬리 가져오기
방학숙제에 쥐꼬리를 가져오라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쥐가 많았습니다.
나라에서”쥐 잡는 날”을 정할 정도로 후미진 곳에는 강아지 만한 쥐들이 몰려다녔습니다.
쥐를 잡아 학교에 가져갈 수는 없으니 쥐를 잡아 꼬리를 떼어 오라는 것이지요.
국민학생이 무슨 수로 빠른 쥐를 잡을 수 있겠으며, 잡았다 한들 어떻게 꼬리를 떼어낼 수 있겠습니까.
나도 경험이 있지만 아이들은 쥐꼬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씹던 껌과 지우개 똥을 섞어서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며 쥐꼬리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꼬질꼬질한 손때가 묻으며 제법 그럴싸한 쥐꼬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어떨 때는 밀가루 반죽과 검은색 크레파스로 쥐꼬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송충이도 잡고 실제로 빗자루로 쥐를 때려 잡기도 했습니다.
엽기적인 일이지요.
삐라와 공책
그 시절에는 산에 북한에서 날려 보낸 삐라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난하는 내용의 삐라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습니다.
삐라를 주어 오면 학교에서 공책을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연필을 한 타스 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공책을 받는 맛에 방과 후에 동네 야산을 돌아다니며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삐라를 찾으려고 숲을 헤치며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나도 빨간색 삐라를 몇 번 주워 봤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금방 전쟁이 날 것 같고 겁이 났었습니다.
엄마 모시고 와
제일 무서운 말입니다.
방과 후에는 청소당번이 있어서 교실을 청소하고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 번은 먼지 떨이개로 먼지를 털다가 급훈이 들어있는 액자를 깨뜨렸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이가 다쳤을까 봐 아이를 먼저 살피겠지만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액자 값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어머니께 말도 못 하고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돼지 저금통이라도 갈라서 액자 값을 물어내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굳이 엄마를 오시라고 매일 독촉을 했습니다.
결국은 어머니에게 고백을 했고 학교에 오셔서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는 선생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경쟁이 심해 어렵게 어렵게 진학을 하고 대학을 졸업해 이제 직장생활까지 끝낸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벌써 내년에는 손주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