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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규 Jun 02. 2024

[16일째][6월2일] 여름 내내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 기억나지 않네요, 사과가 아주 작을 때부터 읽기를 시작했는데, 점점 책 종이가 거울처럼 투명해져서 작은 사과알들을 책을 읽으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점점 책 종이가 물렁해져서 책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사과알들이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활자도 사과알을 따라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책은 물렁해졌고 물처럼 흐르려고 했어요, 물처럼 흐르는 책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요, 사과알이 든 흐르는 책을 여름 내내 읽고 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나무가 책의 물 회오리로 들어왔습니다, 집과 새와 구름이 들어왔습니다, 해가 그리고 내 위의 하늘조각도……, 책은 무거워지고 더 거세게 흐르고, 여름 내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과나무도 구름도 해도 하늘조각도 사라지는 자리에서 


허수경(1964년 ~ 2018년)



어느 여름날, 시인은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사과가 아주 작을 때”부터 시작한 책을 결국 “여름 내내” 그 자리에서 읽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시는 책을 읽던 시인이 어떤 슬픔을 마주하게 되면서 겪는 심정 변화처럼 읽힙니다. “점점 책 종이가 거울처럼 투명”해지면서 “물렁” 해지더니 결국은 “물처럼 흐르려고” 쓰인 것으로 보아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슬픔인 것 같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견뎌내고자 더욱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책에 빠져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책을 펼쳐 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책이 잘 읽히지 않을 정도로 큰일을 겪은 상태처럼 보입니다. “사과알”, “나무”, “구름”, “해” 같은 자연 사물이 책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슬픔에 젖은 시인은 “여름 내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 200자 원고지: 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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