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한 대만으로도 공간을 가득 채웠던 순간
종종 공연을 보러 다닌다. 요새도 후기를 sns에 쓰긴 하지만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정작 생각을 정리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 블로그를 열심히 했을 때는 꼬박꼬박 길게 후기를 썼었는데... 매번 그게 아쉬웠다. 이제부터라도 브런치에 후기를 좀 길게 풀어서 써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글과 사진이 같이 들어간 글보다는 글 하나에 집중해보고 싶다. 첫 번째로 지난 목요일에 다녀온 피아노데이 서울에 대한 후기를 좀 정리해보려 한다.
'피아노데이'는 나의 최애 뮤지션 중 하나인 독일 뮤지션 Nils Frahm이 피아노에 대한 무한 사랑으로 만든 날. 매년 88번째 날 열리는 프로젝트 공연으로 전세계 뮤지션들이 한날에 각자의 자리에서 피아노를 이용한 공연을 펼치는 날이다. 그런 뜻 깊은 피아노데이인데 한국에서는 언제 하려나 싶었는데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뮤지션인 11님이 '피아노데이 서울'을 기획한다고 하셔서 안 갈 수가 없었다.
공연장에는 피아노 한 대만이 있었다. 공연 소개글에는 이날 연주한 음악교육자 방혜원이 유년시절에 치던 피아노를 가져왔다고 적혀 있었다. 삼익피아노 업라이트형 모델이었다. 보자마자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살던 집에 있던 피아노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다.
공연은 5명의 연주자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25분 동안 연주하는 방식이었고 인터미션이 없이 계속 이어졌다. 클래식, 재즈, 즉흥음악, 현대음악을 한 데 아우러 들을 수 있었고 각각의 음악 색깔을 극명하게 달랐음에도 하나의 어떤 주제 같은 것으로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피아노음에 몸을 맡기는 듯한...
첫 연주자인 방혜원과 11은 가브리엘 포레의 곡을 듀엣으로 연주했다. 귀가 기억하는 그 선율을 듣고 있으니 옛날 피아노학원 다녔던 시절이 생각이 나면서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
11은 최근 작업한 작업을 들려주었다. 미세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감정이 들어 있는..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찬찬히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음악. 11이 들려준 첫 곡은 ‘Cascade(to fall)’이라는 제목의 곡. 마침 이날 저녁의 가라앉은 기분과 맞물리는 것처럼 들려서 깊이 빠져 감상했다.
11 다음에 연주한 사람은 재즈와 즉흥음악을 하는 피아니스트 이한얼. 깊이 있는 즉흥연주를 본 거도 오랜만이지만, 허밍소리를 하는 연주자를 직접 눈 앞에서 본 게 처음이라 신기했다. 깜짝 놀라면서 음악에 빠져 들었다.
피아니스트라기 보다 작곡자라며 자신을 소개한 이상욱 연주자는 클래식 왈츠, 동료와 자신의 곡을 들려주었다. 곡을 연이어 듣는데도 짧고 경쾌한 왈츠여서 그런지 유쾌했고 재미있던 무대였다. 보고 있으니 예전에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담이 좋으신거 같은데 이날 시간이 짧아서 말씀을 아끼신 듯 했고 연주도 굿이었다.
피아노데이 서울의 마지막 연주자는 재즈 트리오 더티블렌드의 피아니스트 최민석이었다. 깊이 있으면서 클래시컬한, 자유로운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춘천 여행 가서 작업한 곡을 들려줬다고 했는데 어떤 사연이 있으셨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고... 피아노만 계속 나오는 공연이라 마지막 연주자에게는 부담이 되었을텐데도 끝에 어울리는 무대에 선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출연 연주자들을 잘 모르긴 했지만 그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아,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이고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각자가 단 25분간의 공연을 펼쳤었는데도 너무 많은 것을 들려줘서.. 다들 너무 멋있었고 정감이 갔고 앞으로도 응원하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면 피아노가 중심이 된 음악 공연을 별로 못 본것 같다. 공연장인 스튜디오 로그는 녹음실로도 쓰인다는데 소리의 울림과 잔향이 짙게 남아서 듣기 좋았다.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피아노 소리를 눈 앞에서 들을 수 있다니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의 공연이 초등학교 아이들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 교양 프로그램처럼 사회자가 소개를 곁들이면 학부모님이나 학교, 공공도서관에서 좋아할 거 같은 포맷인데, 이미 많이들 할 것도 같다 ㅎㅎㅎ 지나가던 길에 피아노학원이 보여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낮에는 일하느라 치이다가 저녁도 못 챙기고 달려 왔는데 제대로 귀 호강을 한 시간이었다. 사회에 찌들은 때가 정화되는 기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피아노데이 서울’을 봤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