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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13. 2018

말하지 않는 예의

틈틈이 고쳐 쓰는 반성문

함께하면 기쁨은 배로, 슬픔은 나뉜다는 말.

올해 상반기는 -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 힘든 시기였다. 머리도 마음도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로 가득했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도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친한 친구와 함께하더라도, 쉽게 기진맥진하는 나를 숨기기 위해 잠수를 탈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해 본다. 


사실 말이 잠수지. 회사에도 나가야 했고 중요한 경조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결국 당시에 사람을 마주하는 경우는 크게 둘 중 하나였다. "공적인 인간관계" 혹은 "크게 기쁘거나 슬픈 일(경조사)을 함께 나누는 사적인 인관관계". 함께할 때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어진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사적인 만남의 범주가 경조사로만 극단적으로 좁혀진 시기를 겪고 나니, 그 격언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는 힘든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소중한 이들과 그것을 나누는 데에 항상 서툴렀다. 꽤 많은 경우엔 문턱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은 독방에 틀어박혀 끙끙 앓는 것을 택했다. 홀로 골몰하는 데 익숙했지만, 조언이나 공감을 구하는 것은 어색하다 여겼다. 그런 내가 타인에게 자신의 불행을 털어놓을 땐, 이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후일 때였다. 홀로 투닥여 해결된, 이제는 박제가 되어버린 과거의 위협.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선은 늘 그 언저리에서 그치곤 했다.(마치 이 글처럼 말이다.) 덕택에 진실로 불행한 순간, 주변 사람들은 내 불행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

고백하건대, 심성이 심히 뒤틀려 있던 '그 시기'엔 누군가의 행복을 접해도 순수하게 축하해주지 못했다. 그/녀의 행복을 나의 불행과 연결 짓고는 그에 대한 자책이나 원망으로 침몰하기 일쑤였다. "나는 이렇게나 불행한데, 남들은 왜?" 부당하고 부정한 질문들. 내가 뱉은 질문에 옥죄어지는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음에도. 스스로 판 함정에 걸려 넘어지는 바보짓을 반복하던, 그리고는 암울한 감정에 한없이 침잠하던 과거의 나 자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뒤늦게나마 스스로의 우행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행복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첫 째는,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한 관점이다. 지인의 희소식을 액면 그대로 바라보기보단, 그에 다다르기까지 그/녀가 겪었을지 모르는 힘든 과정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운 소식은 슬픈 소식보다 상대적으로 손쉽게 공유되곤 한다. 자신의 불행은 행복에 비해 무척이나 다루기 까다로운 의제인 탓이다. 나 같은 성격이라, 슬픔을 터놓기엔 너무 먼 사이라, 혹은 그럴 기회가 없어서... 저마다의 무수한 사정은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까지 닿는 것을 방해한다. 간헐적으로 전달된 행복의 가면 뒤엔 슬픔이 있었을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충분히 조심해야지. 남의 불행을 단순한 요행으로 치부하지 말아야지. 당치도 않던 질투나 자괴감은 조금 내려두고, 누구보다 남의 행복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해본다. 


두 번째는, 내 행복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행복을 너무 쉬이 전하는 것이 아닐지 돌아본다. 어쩌면 내가 꺼낸 즐거운 소식이 타인의 상처에 작은 생채기를 보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남들은 나와 다르게 부정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고 누군가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더욱 조심해야지. 과거의 나를 여전히 기억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혹여나 내 행복이 남의 불행을 보다 깊게 덧칠할까 두렵다.



두려움의 팻말

어른이 된다는 것의 정의는 다양할 것이다. 몇몇 어른들은 '예의를 아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의 기본이라 말하기도 한다. 예의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하지만, 내 나름대로 어른됨의 맥락을 정의해본다. 내가 경험한 힘듦, 불편함, 어려움, 아픔 등 부정적인 기억의 지점들에 두려움의 팻말을 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됨이 아닐까. 아이일 땐 내가 상처받을까 두려웠다면, 나로 인해 소중한 이들이 같은 지점에서 상처를 받지 않길 바라는 것이 어른이지 않을까. 그 팻말을 유념해두고 있다가,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예의라고 믿는다.


사람은 모두 바보인지라,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아픔은 아무리 읽고 써보더라도,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본인이 경험한 아픔을 남에게 투사하는 몹쓸 사람들도 참 많다. 최소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아팠던 기억을 반추하여, 보다 조심스럽고 싶다. 최근에, 기쁜 소식을 전달하게 된 입장이 되어 나도 모르게 들뜨지는 않았나 돌이켜본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나름대로 자기 선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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