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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25. 2018

어떤 청원이 더 정의로운가.

책 <옳고 그름, Moral Tribes>을 읽고

도덕적 부족들

2018년,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가장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온라인 청원 게시판에 특정 청원이 게시된 후, 30일 내 동의하는 인원 20만 명이 넘으면 국가 최고 권력기관 중 하나인 청와대가 직접 답변을 하고 있다. 역대 정권에서 보기 힘든 이러한 개방성소통성이 왜 필요했을까? 어쩌면 이는 문재인 정부가 강조해야 하는 도덕성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 정권의 부당不當하고 부정不正했던 국정 농단을 단죄하며 무대에 등장한 정부, 적폐의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지금의 정부에게 온라인 국민청원 서비스는 자못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청원 게시판에는 평등, 공정, 정의와 같은 서로의 도덕들이 거세게 충돌한다. (문 대통령의 대선후보 당시의 슬로건이었던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일례로 최초로 20만을 넘었던 '소년법 폐지 청원'은, '미성년 범죄자의 최고형 기준을 성년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정당하다'는 도덕적 주장이다. 마치 SNS의 '좋아요'처럼 클릭을 통해 많은 동의를 얻은 도덕적 주장은, 현시대에 논의되고 다루어야 마땅한 중요 현안으로 간주된다. '조슈아 그린'의 책 <옳고 그름> (원제 : Moral Tribes)의 용어를 빌리자면, 청원 게시판은 서로 간의 '상식적 도덕'이 서열 싸움이 펼쳐지는 각축장이 된다. 모두가 도덕적이면서, 서로 다른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저자는 '도덕적 부족들'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부족 간 접점이 만들어내는 의견의 단층은, 청와대가 대한민국 여론의 흐름을 진단하는 시금석으로 쓸지도 모를 일이다. 



도덕끼리의 우선순위

가장 빠르게 20만 명의 동의를 받은 청원은 올해 초 동계 올림픽 때 게시된 '김보름 박지우 선수 국대 자격 박탈 및 빙상연맹 비리 척결 청원'이었다. 하루 만에 30만 명을 넘었던 이 청원(최종 마감 시 61만 명)을, 서로 다른 도덕 간의 충돌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왕따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 비록 그에 대한 규정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고 여겼다고 볼 수 있겠다. 동의의 숫자가 빠르게 늘었다는 것만으로 단순히 대중의 관심도를 예측하는 것은 약간의 논리적 비약이 있겠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왕따 행위의 처벌에는 쉽게 동의한다고 볼 수 있겠다. 


위의 사례와 대비되기에 개인적으로 슬프게 기억하는 청원이 있다.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 성범죄 산업 특별 수사 요구 청원'은 한 달이라는 기간이 끝나기 겨우 며칠 전에야 답변 조건인 20만 명을 채울 수 있었다. (최종 마감 시 20만 8천여 명) 청원글이 올라오기 전 날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웹하드 내 디지털 성범죄 영상 유통과 소비 구조의 어두운 면이 밝혀졌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방치되고 있음이 방영되기도 했었다. 이 청원이 '왕따 처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동의를 더디게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단순히 올림픽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저조한 <그알> 방송이 이유란 말인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빙상선수들 간 왕따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국내 빙상 선수들 - 크게 잡아 봤자 국내의 스포츠 선수들 - 일 것이다. 물론, 왕따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전 국가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감소시킬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웹하드 카르텔 사건'이 커버하는 이해 당사자의 범위가 그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추측한다. 청원에 동의하는 개개인의 열의는 어떠한가. 웹하드 카르텔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부족'들은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페이스북 등 각종 SNS에 청원 동의 독려를 부탁하고, 관련 시위를 주최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빙상선수 왕따 사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청원이 해결되었을 때 피해자들이 얻을 행복의 크기(불행의 감소 측면을 포함한)를 비교하더라도, 웹하드 카르텔 처벌 청원이 압도적으로 거대할 것이다. 이해 당사자의 수, 구성원의 열의, 공리적 행복의 크기. 모든 측면에서 웹하드 카르텔 청원은 더 우선되어 처리되었어야 한다고, 편향된 공정성을 지닌 나는 단언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이 꽤 슬펐다. 




책 <옳고 그름>을 읽으며 얻게 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강력한 렌즈다. 서로의 도덕이 부딪히는 공간에서, 상반된 두 집단의 주장을 예전과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개별 현안들의 상대방이 아니라, 현안들 간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21세기형 신문고라는 미명 하에 '좋아요' 숫자만을 가늠해야 할 것인가. 이를 명징하게 바라보려면 어떠한 렌즈를 보강해야 할까. 시름이 많은 밤, 독후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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