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작가의 글을 마음 놓고 읽어보고 싶다.
나는 - 주변에서 알아볼 만큼만 - '삼국지연의'의 덕후다. 최초로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를 접한 건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요코하마 미츠테루'판 만화 '전략 삼국지' 60권일 것이다. 만화책 표지 날개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삼국지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 아마도 삼국지라튼 컨텐츠가 지닌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격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문구는 어린 시절의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삼국지에 대한 애정은 이후 이문열 평역 본이나 황석영 번역본과 같은 소설에서 '창천항로'와 같은 대작 만화,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와 같은 PC 게임으로 계속해서 되새김질되었다. 세 번이 뭐야 - 돌이켜 보면, 100번은 반복했을 컨텐츠였다. 적어도, 나와 내 주변 '남성' 친구들에겐 말이다.
이질감을 느낀 건 언제였을까. 주변 여성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삼국지를 접하지 않은 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독서량이 방대하거나, 다방면에서 상식이 뛰어나다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이에 대해 신기함을 표했을 때, 상대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삼국지에 유관장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내게 삼국지는 제대로 읽기엔 너무 큰 장벽이 있어. 남자 캐릭터들로만 가득한 컨텐츠는 지루해."
자칭 삼국지 덕후인 주제에,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남성뿐. 여성은 기껏해야 강동이교江東二喬나 초선 정도가 등장하지만, 이조차도 남성들의 행동을 촉발키 위한 장치로 소모될 뿐이었다. 사람의, 아니 나의 시야가 얼마나 편향되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충격으로 한 번 벌어진 상식의 틈새 사이로, 여진이라 불릴만한 충돌이 연달아 다가왔다. 남성들의 서사로 가득한 다른 고전들은 어떨까? 이를 테면 역사서들은? 그리스 고전이나 성경, 불경은? <파우스트>나 <그리스인 조르바>, <데미안>은 어떤가? <슬램덩크>는? 이성異姓의 주인공들만 가득한 컨텐츠를 바라보던 여성 독자의 시선은, 남성인 나와는 얼마나 달랐을까. 감정 이입이 덜 되었다거나, 소외감을 느꼈다거나. 추측의 영역을 지나던 의심은, 통렬한 반성이 되어 돌아온다.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내겐, 그동안 존경하거나 흠모했던 많은 인물을 상실한 계기이기도 했다. 여성,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정치인 안희정의 이중적인 면모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동안 숨겨왔던 사회 각계각층의 '어르신'들의 추악한 민낯이 순차적으로 밝혀지던 때였다. 누군가 허탈한 마음 반, 농담 반으로 앞으로는 여성 인물만 존경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크게 고개를 세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성별에 존경할 만한 이가 적어진다는 건 새삼 슬픈 일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삼국지를 읽을 필요가 없던 여성 독자들이 떠올랐던 것 같다.
한국 문단 또한 미투 운동을 피할 수 없었다. 대학교 시절, 나는 고은 시인의 수업을 들으며 즐거웠고 - 그는 내가 재학하던 학교의 명예교수이기도 했다 - 그의 친필 사인을 받고 기뻐했다. 이젠 그의 글을 다시 읽을 수 없다. 비단 미투뿐만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책장 속에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책들이 늘어만 갔다. 소설가 김훈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을 읽은 후 그의 글을 마주하기 어려웠고, 작가 이외수의 최근 SNS를 눈여겨본 후엔 그의 책 역시 중고서점에 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 시집을 자주 사 모으는 편인 데다, 마음에 드는 시집은 간혹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는데. 남성 시인들의 시에 섣불리 손을 대지 않게 된 것도 이때 이후였다. 나중에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 미리부터 감동받지 말아야지. 리스크 관리를 먼저 고민하는 소심한 마음 덕에 책장에는 여성 시인들의 시집으로 가득 쌓이고 있다.
좋은 글, 좋은 영화, 좋은 사진, 좋은 노래... 기존에 좋아하던 매력적인 작품이, 비윤리적인 창작자가 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걸러지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더불어 새로운 컨텐츠를 찾는 과정에서, 미리 필터를 걸어 창작자를 클러스터링 하면 선택의 폭은 더더욱 좁아지기도 한다. 혹자들은 이를 핑계로 대기도 한다. 창작자를 향한 윤리적 잣대가 표현의 자유를, 선택의 권리를, 출판/영화/음악 시장을 줄인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온전히 동의하긴 어렵다.
얼마 전, 한중일 동아시아 문학포럼에 참석한 일본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창작자와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0/18 뉴스페이퍼 기사, 10/22 한국일보 기사 참고)
‘저자의 의도’라는 것을 일체 무시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보다는 이제까지 어떤 작품을 써왔으며,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받아왔는지, 그리고 소설 이외의 장소에서 어떤 언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해석을 시도하는 편이 즐거운 일이다. 아무리 ‘저자의 죽음’을 운운하며 큰소리를 친다 해도 어떤 작품을 한 사람이 썼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절대로 은폐할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절대로 의식하지 않겠다는 태도에는 너무나도 관념적이며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중략) 가령 카라바조는 사람을 죽였지만, 그의 작품은 미술관에서 전시하면 안 되는 걸까? 프랑수아 비용이 살인을 범했고 그 사실을 시에도 적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여전히 문학과 정치행동의 관계로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저자를 은폐하고 작품의 ‘순수 감상’이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관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작품이 ‘무관계’에 가까울 정도의 거리라는 발상은 미디어의 발전에 의해 생긴 현상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창작자의 '비도덕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가진 일종의 작은 딜레마와 맞닿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작가답게, 작품의 '분리'와 '죽음'을 나누어 정의한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없다. 그런 작가를 미화해선 안 된다. 또한,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단,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예술가, 문인의 작품은 감상할 가치가 없다는 식의 태도에는 선을 긋고 싶다. 작품과 작가 어느 쪽에도 ‘죽음’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콘텐츠와 창작자 어느 쪽도 은폐하지 않되 모두에게 죽음을 선고하지 말라고 말한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작품과 저자는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 게이치로의 대담한 생각은, 내 고민에 일종의 해방감을 줄 수 있을까. 다시 돌이켜 본다. 지독히도 이중적인 걸로 밝혀진 한 정치인의 '도덕적인 발언'을, 지금의 나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술자리에서 자기보다 아득히 약자인 사람을 좌지우지하던 그의 입에서 나오던, 인권을 향한 한없이 바른 외침을 어떻게 되짚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