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옹호>를 읽고
메갈리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기억한다. 그들의 과격한 여러 언행들이 내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그중 가장 용납하기 어려웠던 말 중 하나는 바로 '기생충'이었다. 자궁에 착상한 태아를 낮추어 부르던 그 단어는, 도덕을 추구하던 교양인인 내게 "용납"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사고의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어찌! 감히! 무해한! 태아를 향해! 어머니 된 자로서! 책임도 없지! 쯧쯧!
1971년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발표한 논문 <낙태에 대한 옹호>는 당시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을 목차 삼아 진행된 듯하다. 내가 직관적으로 떠올린 일종의 괘씸함이야말로 논문이 표적 삼았던, 임신중절(혹은 낙태) 반대론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 논문을 통해 톰슨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태아가 생명이면 어떻단 말인가?', '무해한 존재라면 어떻단 말인가?', '강간이 아닌 성행위를 통해 임신이 되었다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간 윤리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임산부(어머니)를 향한 일종의 책임 청구권에 맞서, 톰슨은 '권리'와 '책임'을 재정의하며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10개월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톰슨에 따르면, '한 종류의 충격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이 세상 어떤 나라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정도의 일을 행하기를 법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69p)' '다른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자 건강과, 모든 이익 및 관심사와, 모든 의무 및 헌신의 커다란 희생을 9개월 동안이라도 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63p)'
고루한 윤리는 쌓이면서 처벌을 강제하는 법으로 자리 잡았다. 2018년 8월 대한민국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임신중절 수술을 포함하는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을 발표한다. 설명은 이러하다. 비도덕적인 진료행위들을 세분화하여 처벌 기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위법한 임신중절 수술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현행 제도의 미비점을 개선키 위한 목적이었다고 첨언하기도 했다.
보다 온건한 낙태 반대론자들은 이러한 개정이 무분별한 임신중절을 예방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 수술'의 기준을 열어주는 효익이 있지 않냐고 묻곤 한다. 강간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여기서 잠시 논외로 하자. 톰슨에 따르면, 우리가 서로에게 던져야 마땅한 질문은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강제되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누군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강제되는 것이 맞느냐'일 것이다. 특히 임신중절에 관해서만 유독 강하게 말이다.
통상적인 임신중절 찬반 논쟁의 지형을 바라보며, 톰슨은 또 다른 방식으로 예리하게 쪼개어 질문한다. 임신중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3자의 개입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서로가 주창하는 권리와 도덕을 앞세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주장의 칼날을 벼린다. 자신의 임신중절을, 혹은 임신중절권을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요청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신선하다.
'만약 그가 자신을 구해달라고 호소한다면? 우리가 그를 구할 수 있는 경우, 즉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할 경우가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구할 수 없어 우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바이올린 연주자(태아)에게 당신의 몸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신으로 하야금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일에 우리가 응할 필요가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당신이 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바이올린 연주자(태아)에게 (우리의) 부당한 지점은 없다. (72p~73p)'
그리고 신선하게 느낀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논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일관되게 '자신의 임신중절권에 대한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괘씸함에서 파생된 '옳고 그름의 문제' -를 빙자한 개인의 편향된 도덕적 렌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였지만, 상대방에게는 '옳고 그름의 문제'이자 동시에 '부당하게 선하도록 요구되는 사마리아인들의 권리 주장'이었다. 나아가, 실질적 공포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 과거의 나를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들었던 감정에 어절 별로 느낌표를 찍어가며 분해해 보았지만, 사실 가장 끔찍해야 할 부분은 " " 안에 표시된 용납이라는 단어였다. 그다음으로 끔찍한 단어는 '감히'일 테고. 나는 어쩌자고 용납이라는 표현을 떠올렸을까.
멀리 돌고 돈다면, 세상에 100% 자기 문제가 아닌 일이 어디 있으랴마는. 직관적인 가능성만으로 따졌을 때, 나는 임신 중절 문제에서 주체가 되기 어려운 '제삼자'이다. 원인 제공자, 가해자가 될 수는 있지만 임실중절 자체만으로 봤을 때는 주어도 목적어도 될 수 없는 자가, 용납의 주체는 될 수 있느냔 말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신과 먼 현안에도 논리적/도덕적 오지랖을 부린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너무도 자연스러울 때 - 특히 스스로 쟁취하기보다 타고난 권력일수록 자연스러운 듯하다 - 본인이 오지랖을 부린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당사자가 아닌, 한 발짝 너머의 현안을 바라볼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시선, 더듬이의 길이, 뻗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톰슨의 논문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고자 한다. 과거의 나처럼 스스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적극적 오지랖이 아닌, '당사자의 권리 주장에 대해 특정 부분까지 수용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는 식의 수동적 오지랖이 필요한 건 아닐까.
임신 중절권의 문제는, 독하게 말해서 사회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사회적 파장을 가진 문제일지는 모르지만, 사회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에서다. '이 것은 나의 몸이다.'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라는 시위 속 외침이 애초부터 당연했음을, 나는 70년대에 쓰인 외국의 논문을 읽어가며 에둘러 먼 길을 돌아서야 이해한다.
(심지어 이 독후감마저, 당사자가 아니기에 부릴 수 있는 제3자의 객기가 아닌지 반성하며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