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쓰리 빌보드>를 보고 '예멘 난민 이슈'를 들으며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의 주인공 '밀드레드 헤이스'를 바라보는 '에빙'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여러 갈래로 혼재되어 있다. 그의 딸이 강간과 살해를 당한 지 7개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전 남편의 지속적인 폭행과 바람 때문에 이혼을 한 후, 홀로 두 자녀를 키우던 헤이스는 마을 사람 누구나 인정할만한 비극적인 피해자이다. 이러한 (불쌍하고 안쓰러운) 피해자의 이미지만을 그가 지녔다면, 영화의 드라마는 한층 단순했을 것이다. 헤이스가 자신이 모범적인 피해자의 이미지를 포기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불편하게 하기로 작정하고, 마을 외곽의 오래된 빌보드 세 개에 색깔과 내용 모두 원색적인 글귀를 새긴다. 사바세계의 드라마는 대개 이렇게 펼쳐진다.
헤이스가 표적으로 삼은 '빌 월로비'가 무능한 경찰서장이었다면 사람들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헤이스의 분노에 동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월로비 서장은 성실하고 인망이 높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기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딕슨'같은 경찰들로 가득한 경찰서에서, 그는 긴 손 편지를 유려하게 쓸 정도로 유식한 인물이다. 말기 췌장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가족과 일에 성실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욕하거나 미워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그는 경찰이 지닌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헤이즈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헤이스가 월로비를 표적 삼자, 에빙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기념품 상점에 쳐들어온 정체 모를 남자나 치과의사는 헤이스가 괜한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아들 '로비'는 동급생들 상당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며 동시에 창피해한다. 인간말종 같은 경찰로 그려지는 '제이슨 딕슨'에게 월로비 서장은 존경할만한 상사이기에, 딕슨은 헤이스의 주변 인물들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반대로 딕슨 같은 차별주의자 경찰관들에게 원한이 있던 흑인, 난쟁이, 동성애자 등의 약자들은 헤이스를 응원하며 힘을 보탠다.
저마다 나름의 사유가 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른다. 그리고 서로 다른 행동의 접점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 좌충우돌은 영화를 깊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 위치한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각각의 캐릭터가 가지는 서사와 고민의 깊이가 납득되도록 영화가 충분한 설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절대적인 선역이나 악역이 아니란 점이 흥미롭다. 난쟁이인 '제임스'는 경찰이 싫어 헤이스를 돕지만, 후에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것을 빌미로 헤이스에게 자신과 데이트해주기를 바란다. 광고업자 '웰비'는 자신이 이룩한 일에 철없게 공명심을 느끼는 타입이지만, 끝내 자신을 해한 인물을 용서하는 인물이다. 약자를 무시하고 비하하던 딕슨은 사실 본인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 마마보이로 어머니만 모시고 살지만 그 어머니 역시 차별주의자이다. 끝내 헤이스의 복수로 인해 얼굴의 절반에 흉한 화상을 입어 '괴물'freak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는 괴물이 된 이후에야 범인을 찾기 위해 애쓰며 헤이스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주인공인 헤이스는 어떠한가. 그는 월로비 서장이 전면적으로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빌보드에 글귀를 쓴다. 월로비가 자살한 것에 개인적으로 가슴 아파하지만, 그 자살을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주한다. 빌보드를 태운 것이 경찰이라 지레짐작하고 경찰서에 테러를 벌여 사람을 다치게 하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제임스와의 식사 한 끼를 부끄러워할 정도로 옹졸하기도 하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헤이스의 투쟁과 고뇌를 여실히 필름에 담은 후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헤이스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헤이스에게 '복수는 나쁜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있겠냐고.
단정적인 문장으로 쉬이 정의 내리기 어려운 세상의 복잡함을, 영화는 에빙이라는 작은 마을 속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담아낸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 속에서 '복수는 나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두 명 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목사와 헤이즈의 전 남편 '찰리'의 젊은 연인인 '페넬로페'이다. (작중 헤이스의 입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받은 목사를 열외로 한다면,) 수많은 사람 중 하필 페넬로페가 저렇게 말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라고 해맑게 덧붙이며 말하는 페넬로페의 명제는, 단정적인 만큼이나 아무런 힘이 없다. 그저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옳은 명제'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헤이스에게 어떤 힘이 된단 말인가. 페넬로페를 보며 그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는 헤이스의 모습에서, 세상 속 생각 없는 명제에 대한 무용함을 엿본다.
흔히들 단순한 문장에 힘이 있다고 말한다. 같은 컨텐츠를 길게 늘여놓는 것보다 단순함에서 오는 강력함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할 것이다. 내가 정의하는 '단순한 말'은 그저 쉽게 말하는 (혹은 뱉어내는) 말들이다. 단순한 말에는 힘이 없고, 무용, 불필요하다. 최근 제주도에 무비자로 입국한 예멘 난민에 관련된 이슈에 관한 여러 말들을 듣고 읽으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이 단순한 말에서 시작한다.
피부색이나 성별, 국적 등 한 가지 요소만으로도 차별받는 사람은 있겠으나 세상에 차별을 구성하는 요소가 한 가지인 것은 아니다. 예멘 난민 이슈에서 사람들 간 의견이 충돌을 빚는 지점은 다양하지만, 그중에는 이러한 차별의 층위에 따른 가치판단의 차이 역시 포함된다. 평소보다 더욱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다수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난민'과 '이슬람 난민 남성의 물리적 위협을 걱정하는 한국 여성'이라는 층위 역시 이에 해당한다. 내륙과 반대항으로서 '섬주민으로서 가지는 약자성'에서 비롯된 문제 제기도 이에 해당된다. 불쌍한 사람은 당연히 불쌍한 복장을 해야 한다는 편견도 여기에 해당될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저 '난민이 싫어서 반대'한다거나 '인권 문제이니 당연히 난민을 받아줘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보다는 각자가 처한 상황, 공포 등의 감정, 중요하다 여기는 철학이나 신조 등에 비추어 고민의 결과물들이 공론장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왜냐면 현실세계의 실타래는 늘 이렇게 복잡하니까 그러하다.
이런 논의에서 가장 배격해야 할 것은 생각 없이 내뱉는 단순한 말, 즉 생각 없는 조소와 비방이다. "난민 입국을 반대하다니 역시 한국사람들은 미개하다."라던지 "무턱대고 인권 뽕에 취해 난민 입국에 찬성하자니 현실감각이 없다."라던지 말이다. 위의 말들을 실제로 마주하며 내가 느낀 감정은 아연함이었다.
현실 속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대다수의 논의 중 단순한 것은 거의 없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퍼즐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난민 이슈'는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한국 사회가 보다 복잡한 현안을 풀어나가기 위해 숙고하며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발화하는 가운데, 타인을 그저 우민으로 치부하며 찍어 누르는 비난이야 말로 가장 우매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페넬로페를 바라보며 헤이스가 느낀 그러한 아연한 비현실감을 상기하며, 부디 스스로가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 되새김질하길 바란다.
배우 정우성은 난민과 관련한 댓글들을 여러 번 고쳐 읽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 이면에 있는 감정, 이를 테면 공포나 걱정 등까지도 읽고 이해하고자 노력한다고 말했다. 타인과 자신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같은 땅에서 엉켜가며 살아야 한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공에 뜬 힘없이 옳기만 한 대사를 읊는 대신 현실에 뿌리내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함께 뿌리내리는 방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