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소리엘 Feb 11. 2018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영화 <1987> 관람 후

'인간'과 '인간'

 새해 첫 독서 토론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주제로 시작되었다. 복제 인간에 관한 격앙된 토론을 뒤로한 채, 발제자는 다음 주제로 자연스레 토론을 진행시켰다. 주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에 대한 물음이었다. 한 분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한 뒤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분은 '인간다움'이란 '이중성' 그 자체라고 답했다. 어떤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더라도 사람은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의 삶에 위험(혹은 불편함)이 생기면 그 가치를 포기할 것이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그 순간, 나는 그 대답에 저항하고 싶었다.


 놀라운 건, 심지어 나도 그 발언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꽤나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는다. 나는 옳은 말에 저항하고 싶어진 것이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던, 이유 모를 그 저항심의 근거를 찾고자 이 글을 쓴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 내가 메시지를 오해했을 가능성을 언급해야겠다. 기억 혹은 이해의 한계 때문에 나는 당시 발언자의 진심을 곡해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의도를 오해했는지 여부가 이 글에서 크게 중요치 않을 것이다. 이건 내가 왜 '인간다움 = 이중성'이라는 메시지를 옳다 여기면서 동시에 저항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기 때문이다. 혹여 저 등식이 나의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손 쳐도 말이다. 



현상과 당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에 답하기에 앞서, 질문에 중복하여 사용된 '인간'이라는 단어를 쪼개 볼 필요가 있다. 그 둘은 같은 단어면서도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쓰인 '인간'은 현실의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 종 전체를 아우르는 현상 말이다. 그렇다면 뒤에 쓰인 '인간'은 현상의 반대항인 당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 공동체와 그에 속한 개인이 모둠살이를 위해 지향해야 할 특정한 방향성 말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질문은 이렇게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기존 Q.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Q.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표방하는 지향점(=당위)에 늘 미치지 못하는 삶(=현상)을 살아간다. 나부터도 그렇다. 노동자 인권 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하지만 그 흔한 야근 수당을 신청하지 못한다. 명문대 졸업을 이력서에 기재하면서 학벌 사회와 그로 인한 차별을 비판한다. 영화 <옥자>를 보며 가슴 아파하지만, 기계식으로 도축된 육류를 야식 삼아 하루의 스트레스를 푼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맨스 플레인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등등. 나부터도 매우 이중적이다.



깨끗한 척과 솔직한 것

 나부터도 이중적이면서, 나는 왜 그것이 인간성의 요체라는 말에 저항했을까. 어쩌면 정말 방귀 뀐 놈마냥 지레 켕기는 마음에 성을 버럭 낸걸 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중성'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뉘앙스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다중적이다'라고 표현을 고치면, 거부감이 훨씬 덜할 것 같으니 말이다.) 이중성이라는 단어가 인격체를 향할 때는 대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그건 '솔직하지 못한 무언가', ' 숨겨야 할 무언가', '고쳐야 할 무언가', '극복해야 할 무언가'를 수반하는 단어가 된다. 이러한 심리적 서사는 '이중성'에게 지목된 대상을 '겉과 속이 동일한, 순수하고 긍정적인 무언가'로 나아가기 전의 상태 혹은 가지 못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작년 봄의 일이었다. 친한 형과 정치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발언을 들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인들은 똑같이 부패한데, 개중에는 깨끗한 척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것이 더 낫다." 나는 자못 큰 충격을 받았다. 더러운 주제에 깨끗한 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더러운 것이 낫다는 그 말은, 이중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뉘앙스들의 총체가 아니었을까.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그 말은 당위를 아무리 외치더라도 그 자신부터도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차라리 솔직하게 현상에 천착하자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고귀하려 노력하지 말고 다 같이 천박해지자는 말, 겉과 속이 모두 천박하면 차라리 이중적이지는 않겠지. 고귀함-천박함의 프리즘으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나는 흡사 그런 말을 들은 사람마냥 서글펐다. 


 내 심리적 분노와 소심한 저항의 대상은 '이중성'이라는 단어로 된 프리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나는 그 뉘앙스를 무기로 스리슬쩍, 당위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싫다. 그 프리즘을 통해 투과된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어차피', '아직은 시기상조' 운운하는 말을 자매품처럼 싫어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이중적일 것이라면 그저 본능대로 살란 말인가. 기치에 건 저마다의 깃발은 필요 없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면, 나 자신이 너무도 처량해지는 기분이 든다. 저런 단어들을 마지막까지 목구멍 아래로 삼키게 되는 이유다. 저런 말들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되려 절실히 이해하기 때문에.



영화 <1987> 속 '인간'들

 지난달 흥행에 성공한 영화 <1987> 속 등장인물들을 떠올린다. 영화에서는 그들을 정의롭게 묘사하지만, 그 정의로움의 크기는 절대로 거대하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생업을 병행하면서도 가장 열심히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던 인물은 교도관 한병용(배우 유해진)이다. 그리고 그런 그마저 자신의 가족이 위협을 받자, 끝내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사람은 춥고 배고프면, 자신이나 가족이 위협을 당하면 비참하게 현실을 타협한다.


 혹자는 영화 <1987>을 영웅극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고난이 양념으로 들어갈 뿐 결국) 승리로 점철된 영웅극으로 비화되는 것에 반대한다. 인간이 짊어진 이중성의 굴레를 극복하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영화에 등장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망칠 것이다. 영화 <1987>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현실 속 우리처럼 현실에 바짝 엎드려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더욱 인상적인 영화가 된다. 영화는 주변에서 쉽사리 내뱉는 '솔직히'나 '어쩔 수 없이'같은 강대한 문법에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그 말을 쉽게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조명한다. 현실에 억눌리면서 틈틈이 남을 위한 조그마한 양심을 챙기는, 그런 치사할 정도로 이중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에 필요하다고 영화는 강변한다. 그것이 사회를 끝내 조금씩 바꾸는 '공감'과 '양심'의 작은 단초가 된다. 


(JTBC 시사 예능 <썰전>에서 작가 유시민은 '사람은 살다 보면 한 번 쓰이는 때가 있다'라고 영화 <1987>에 관한 자신의 소회를 말한다.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를 한 번 쓰이는 작은 '양심'에 있다고 해석하면 너무 내 신념에 심한 아전인수일까.)


 어차피 바뀌지 않을 세상이라고 현실의 자기 삶에만 몰두한다면, 세상은 정말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 인간다움을 묻는 질문에 '사람들은 이중적이다'는 답변은,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노력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할 뿐, 그것이 왜 값진 것인지 서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중적이기 위해 발버둥친 피와 땀을 묘사해야 한다. 그 노력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답해야 한다. 노력에 참여하기 위해 고민한 기록들을 읽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러길래 왜 나서서', '그놈이나 저놈이나' 등등 진보를 향한 누군가의 이중적인 몸부림을, 지탄하고 이죽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거대한 뉘앙스에 소심하게 저항해야 한다. 저런 말들을 입 밖으로 안 하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아주 조금은 빨리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