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승 May 13. 2021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Right Now, Wrong Then, 2015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이 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줄여 지맞그틀이라 칭한 지 오래되었다셀 수 없이 많이 언급한 제목인데 매번 그대로 말하기엔 길어 줄이기 시작한 것이 착오였다앞으로도 나는 이 영화를 <지맞그틀>이라 부를 것 같지만우연히 그리고 오랜만에 이 영화의 제목을 온전히 입으로 말하는 기회가 있었고아차 싶었다.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는 한 극장에서 진행될 GV에 참석하기 위해 수원에 들렀으나예정보다 하루 일찍 오게 되어 근처를 다니다 수원화성행궁에 가게 된다추운 겨울날들 중 하루였지만 따스하게 볕이 드는 복내당의 툇마루에 앉아 잠시 잠을 청하려는 찰나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 소리를 내며 등장해 바나나 우유를 먹는 윤희정(김민희)을 만나게 되고하루를 함께 보내게 된다희정의 화실도 가고함께 스시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희정의 지인들도 만나게 된다그렇게 영화의 전반부가 끝이 나고 키치한 음악과 함께 영화의 제목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이게 하나의 에피소드고 또 다른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인가? <지맞그틀>은 옴니버스 영화인가아니다춘수와 희정의 복내당에서 시작한 하루가 약간의 차이를 두고 다시 한번 반복된다.


지금은 맞고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까지 모두를 고려해야 했으나 띄어쓰기도 없이 쓰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한 호흡에 말하기만 바빴고하나씩 고려해볼 생각을 왜 하지 못했던가현재 시제인 지금은” 현재 시제로 맞고”,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그때는” 현재 시제로 틀리다”. 그때는 과거가 될 수도 있고미래가 될 수도 있는데 나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었다다시영화의 전반부가 1부고 후반부를 2부라고 가정했을 때, 1부와 2부 사이에 또 하나의 오프닝이 존재한다예사의 영화를 보면 영화가 시작할 때 앞으로 두 시간 남짓 펼쳐질 이야기를 암시하는 짧은 장면이 있은 후에 영화의 제목이 화면을 채운다던가그것도 아닌 채로 대뜸 제목이 화면을 채웠다가 영화가 시작하기도 한다옴니버스라면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하며 그에 맞는 제목이 나오게 마련이다편견처럼 갖고 있는 오프닝이란 그런 것이었다다시, 1부와 2부 사이에 영화의 오프닝이 있다. “나오는 사람들과 만든 사람들의 크레딧이 나오지 않는 사이의 것은 신묘한 힘을 지닌다그냥 단순하게 1부의 반복이라고 하면 쉬운데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다른 인물의 관점이나인물의 태도를 달리해 재구성한 것이라 보기에도 어렵다. 1부와 2부의 세계는 분명 독립적인 것이다하지만 같기도 한 평행우주 같다.


121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를 거의 절반으로 나눠 1부가 끝난 뒤당혹스럽게도 다시 한번 같은 일정이 반복된다지금은 이런데그때는 저랬다는 식으로 말이다이를테면, 1부에선 호스텔에 올라간 함춘수가 창밖을 내려다보니 너무 이쁘네조그만 놈이 너무 늘씬하고 너무 젊어조심해야 돼너무 예뻐.”라 말했던 염보라(고아성)가 있으나, 2부에선 염보라의 시선으로 호스텔의 창문을 올려다보니 그곳에 함춘수가 있다. <수정>(2000)에서 재훈(정보석)이 겪은 일을 수정(이은주)의 관점으로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과는 아예 다르다. <메멘토>(2001)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레나드(가이 피어스)와도 다른 것이다그는 중요한 단서를 자신의 몸에 메모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다그의 기억이 닿는 곳까지 나아가다가 화면이 전환된다그러나 <지맞그틀>에선 그럴 만한 장면이 없다함춘수가 복내당의 툇마루에서 잠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잠이 들기 전 윤희정의 등장이 있었다거슬리는 비닐봉지 소리가 꿈의 세계로 조차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크리스토퍼 놀란의 데뷔작 <미행>(1998)처럼 원래 [오프닝-1-2]의 순서였던 것을 이야기의 순서만 바꿨다고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그저 대동소이하게 나란히 반복되는 1부와 2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의 머릿속에선 다양한 작용이 일어난다.



1부와 2부로서 반복되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는 제목의 지금과 그때라는 말로도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맞고는 현재인데, “그때는 틀리다를 보면 그때가 의미하는 것이 과거인지 미래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틀렸다나 틀릴 것이다처럼 그것을 유추할 수 없게 틀리다라고 현재 시제로써 맺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함춘수와 윤희정은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일련의 과정을 2부에서 완전히 처음 겪는 것처럼 행동한다. 2부 속 인물들에게 1부란 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사실 이런 반복이 <지맞그틀>에서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촌방향>(2011)에서도 그랬다선배 영호(김상중)를 만나러 왔던 성준(유준상)은 옛 여자 친구인 경진(김보경)을 만난 후에 영호의 지인인 예전(김보경)을 만나러 간다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두 명의 인물성준은 그를 그저 닮았다” 정도로만 여긴다설명할 길 없는 성준의 반복되는 일화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배우(박수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나라에서>(2011) 역시 그랬다. 3부작으로 구성된 영화는 휴양지의 해상 안전요원(유준상)이 만나는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세 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을 그린다. <옥희의 영화>(2010)나 <자유의 언덕>(2014)에서는 앞서 언급한 놀란의 것들처럼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에 텀을 두어 사건 간의 중첩되는혹은 그것들의 차이를 본다영화가 끝나고 새롭게 영화가 시작하는 인상을 주는 <극장전>(2005)도 있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은 아예 대놓고 해원(정은채)이 꾸는 꿈의 이미지를 다뤘다.


나열한 필모그라피와 <지맞그틀>이 다른 건 단지 1부와 2부 사이에 삽입돼있는 오프닝을 빼면 반복을 이어주는 지점이 없다는 것이다성준이 길에서 만난 여배우, <하하하>(2009)에서 통영을 소재로 술을 마시며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이야기를 하나씩 주고받자고 한 선언, <자유의 언덕>의 모리(카세 료)가 겪는 뒤죽박죽인 사건들의 파편을 한데 모으는 권(서영화)의 행위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맞다 틀리다를 규명하지 않는 <지맞그틀이후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세계다아직 이르진 못했으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으로써, <지맞그틀>은 애초에 문법을 하나하나 따지지 않아도 될그때가 과거인지 미래인지 따위 고려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그때라는 것이 <클레어의 카메라>(2016)에서 클레어가 들여다보는관객에게는 끝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굴다리 아래라던가, <풀잎들>(2017)에서 지영(김새벽)이 오르내리는 층계의 경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지맞그틀>에 별 다섯 개를 준 이들에게 1부와 2부의 차이가 무엇이냐 물으면 하나같이 2부가 더 솔직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더 솔직하다솔직하다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터인데우리는 무의식적으로 1부의 춘수와 2부의 춘수를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희정이 그런 춘수에게 다르게 반응하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서 우리 머릿속에서 자연히 1부와 2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1부의 마지막에 희정이 집에 들어가고 화면에 자리하는 커다란 불상을 우리는 보았다. 2부에서 희정의 화실 건물 옥상에서 그가 춘수에게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저기 큰 불상 보이시죠그 밑에 큰 집 조그맣게 안 보여요까만 기와로 된 집?”이라 말할 때우리의 눈앞에는 그 불상과 기와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데자뷰란 말인가관객의 눈엔 똑같은 인물들이 똑같이 반복하는 일화처럼 보이지만그것은 영화적인 설정일 뿐 과거의 어떤 일을 틀렸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강변호텔>(2018)에 이르러영환(기주봉)의 시에 등장하는 이카를 끝내 부정하고야 마는, <지맞그틀>은 아직 밀고 나아가지 못한 세계이나 그것으로 향하는 중의 것인가.



수도권이긴 하나 분명 서울의 도심과는 먼 수원의 아마추어 예술가인 희정에게 저명한 예술가 춘수의 존재는 한 번쯤 함께 자리를 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쉬운 관계인 것 같다. <생활의 발견>(2002)에서 저명한 배우인 경수(김상경)에게 춘천에서 만난 무용가 명숙(예지원)이 갖는 관심이나홍상수의 영화에서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감독교수선생님작가 같은 설정 말이다그것이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어떤 식으로든아무리 늦은 시간에라도 방으로 함께 들어가고야 말았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같은 건 없다. 2부의 춘수는 자신이 유부남임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 희정에게 밝힌다술에 취해 일어난 과장된 행위이긴 하나 자신을 둘러싼그리고 옥죄는 무엇을 벗어던지기 위해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기도 하며여전히 희정에게 끌리고 있으나그가 자신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기도 했으나곧장 강원도 경포대로 날아가고 싶었으나 그 선을 넘지 않는다선을 넘지 않은 지금은 맞고넘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인가.


<강원도의 힘>(1998)로부터 <첩첩산중>(2009)에서 <우리 선희>(2013)로 이어지는 정유미의 등장 이전엔(분명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정은채도 있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정은채라는 배우가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홍상수의 의도이거나 배우의 연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모두 도구화된 인물이었다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바로 다음 작품인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오윤홍)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상권(백종학)에게 임신중절 수술을 했음을 고백하나 그의 입으로 해줘.”라는 말에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라던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를 거쳐 <북촌방향>의 예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남성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예쁘다”라고 말하다가 결국 섹스를 요구했다비로소 정유미에 이르러서야 여성들의 영역이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자유의 언덕에서>에서는 외국인인 카세 료를 주연으로 내세우며 변화를 시도했다물론 그도 영선(문소리)과 섹스를 하긴 하지만 그는 이내 후회를 하고영화에서 관찰자와 청자의 태도를 취한다. 1시간 6분이라는 짧은 영화에서이제 처음 선보이는 시도였기에 미미하긴 했으나 분명 홍상수의 영화는 변하고 있었다. “아름다우십니다.”라고 말하는 영환에 이르기까지.


나열하다 보니 영화의 1부는 정유미 이전의 영화에서 다룬 이야기였고, 2부는 김민희 이전의 영화에서 다룬 이야기였다. 2015년 막 추워질 즈음 극장을 찾았던 나 역시 1부보다 더 솔직해진 2부를 만났었으나이제는 1부와 어떤 변화를 주려 시도하고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2부의 함춘수를 보자자신이 영화감독이라며 먼저 으스대지 않고지식인인 것처럼 교양인인 것처럼 허황된 말로 환심을 사려하지 않으며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잣대로 예술을 말하고자신이 넘을 수 없는 선을 먼저 밝히며다시 한번 말하지만 술에 취해 과장된 행동이긴 하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벗어던진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천 년도 넘은 과거에서 공주를 둘러싸고 있던 뱀이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풀어주고야 말았을 때의 심정을 비 내리는 날 선영의 집 앞에서 똑같이 행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을 잊지 않으려는지도 모르겠다.


저기서 조금 전까지 완벽했는데라는 춘수의 말을 빌려 둘이 함께한 시간을 뒤로하고 그들은 서로를 떠나간다그런데 꼭 거센 눈발을 뚫고 나아가는 희정의 모습은 <극장전>의 마지막처럼혹은 <북촌방향>의 마지막처럼 끝이 났으나 끝이 나지 않았다겨우 수원에서 서울로 헤어지는데 영원히 못 볼 것처럼 말하는 춘수와 희정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당장 내일 수원화성의 복내당에 가면 기둥에 기대 잠을 청하려는 춘수 앞에 비닐봉지를 바스락 거리며 바나나 우유를 들고 온 희정이 나타날 것 같다그리고 또 서로를 지나쳐가겠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김민희 #정재영 #최화정 #서영화 #기주봉 #윤여정 #홍상수 #영화


작가의 이전글 <키리사마가동아리활동그만둔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