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승 Jun 04. 2021

<인트로덕션>

INTRODUCTION, 2020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기란 어려운 일이다좀 전에 내 발 앞까지 와서 부서졌던 파도를 찍기 위해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려도 좀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의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요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사람 마음 하나 잡기가 정말 참 힘들죠.”라 말하던 고순(고현정)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에 대해 강조했었다그리고 그가 떠나간 자리를 <도망친 여자>(2019)에서 감희(김민희)가 에무 시네마에서 보던 그 바다가 대신한다감희가 상영관으로 두 번째 들어왔을 때그가 보는 장면이 처음과 같은 것인지처음에 보던 이미지는 지나가고 그다음의 이미지가 나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감희는 본다애초에 바다라는 것이자연이라는 것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보더라도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강원도의 어느 해변에 누워 그 파도와 바람과 햇빛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 같았던 장면과는 또 다를 것이다그 거리감부터 다르지 않나인터폰으로조그만 창문으로 보던 것과 크기도 다르다그런데 웬걸영호(신석호)는 그 바다에 뛰어든다엎질러진 물은 물이고그것을 주워 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닌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가 보다 싶었다.


이제 서른 편을 앞두고 있는 홍상수의 영화들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했던 눈과 강과 바다그러나 이번엔 그것을 카메라에 담을 때 영화적인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그저 그곳에 있었는데 눈이 내려주었고강이 있어주었고바다가 있어주었다아니그냥 뭐라 말하기도 애매한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독일의 어느 곳인지강원도의 어느 곳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강변호텔>(2018)에서 호텔 앞을 지나가던 고양이를,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와 영순(서영화)에게 고양이에 대해 따지던 사내(신석호)가 등장하던 장면에 문득 지나가 준 고양이를 클로즈업하는 행위는 <인트로덕션>에 없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 <그 후>(2017)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강변호텔>에서 영환(기주봉)의 시처럼 다른 이의 말을 언급하거나 인용하지도 않는다홍상수의 영화에서 영화적인 무엇들은 계속해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이번 영화는 정말이지 다 빠져나가서 당최 내가 무엇을 본 것인가 싶었다이대로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어느 인물처럼고상하게 죽는 것이 전부라는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로서영화라는 틀에서 죽어버린 것 같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선 그저 소망이었던 것이, <풀잎들>(2017)에선 아름(김민희)이 간접적으로나마 겪는 영화에서 실재한 일이었고, <강변호텔>에선 영화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이미지가 바로 죽음이었다난 <도망친 여자>는 <강변호텔>의 이카로부터 도망친 것이라고 내내 생각해오고 있다어려서는 덧니 난 매력적이었던 아이가 점차 어둡게 자라더니본래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지금의 달라진 모습에 슬퍼하는 이카로부터눈이 오는 날눈이 오는 날 찾아온 매력적인 아이의 모습은 꼭 고마운 밤눈이 내리는 날 찾아온 특별하고 예쁜 손님 아름 같았다아름다운 아름. <강변호텔>에서 죽음과 이카로부터 도망친 여자는 <클레어의 카메라>(2016) 이후 컬러감을 찾았다김민희와 서영화송선미와 김새벽 등 이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등장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주는 이들과 달리뒷모습과 옆모습만 찰나에 비치던 이들은 <인트로덕션>의 주인공이 되었다그리고 그들은 단지 주인공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김영호), 간호사(예지원), 화가(김민희)처럼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이들과 구분된다영호(신석호), 주원(박미소), 정수(하성국)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무엇을 하지 않아도 영화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배우들이 있다. <지맞그틀이후 김민희가 줄곧 그래 왔고, 기주봉 배우가 그래 왔고, 서영화 역시 그랬다그들이 말하는 대사들은 언제나 영화적이었다그 장면만 똑 떼어서 두고두고 곱씹어보곤 했다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영호와 주원성수가 나누는 대사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이다감독의 지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전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영화가 아니라 그저 내 앞자리쯤에 앉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 같달까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전의 배우들에게서 오히려 영화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영화에 유일하게 영화적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맺는 세 번의 포옹이다다시영화를 이것이 강원도의 어느 해변인지물 건너 다른 나라의 어느 곳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찍어놓았다그것이 어디든 영화 속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 존재할 법한아니 어딘가에 꼭 있을 누군가를 담은 느낌이다이제 그때가 되어버린 이들에겐 이름도 부여하지 않고지금을 사는 누군가의 모습을 조명한다간호사와의 포옹여자 친구와의 포옹친구와의 포옹은 영화의 제목(Introduction)처럼 한 사람이 뭔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어떤 것의 처음 부분 그리고 새로운 것을 (세상에)가져옴이다.


사실 <인트로덕션>은 66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무색하게도 지루하게 느껴질 순간이 많았다관객인 내가 민망할 만큼 밋밋한 주연들의 연기가 한몫했을 수도 있는데그래서 내가 지금 보는 이미지가 이 씬의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 모를 즈음 포옹으로 에둘러 끝내는 느낌도 있었다이창동 감독님의 <버닝>(2018)을 보면서는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인가 의문이었다이를 테면 종수(유아인)가 찾아 헤매는 비닐하우스처럼 말이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내 마음을 파고 들어오는 무엇이 있었다눈으로 보이지도 않고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을 것 같았던 무엇들이. <인트로덕션>엔 의도적으로 배제하고포기하고 남겨놓은(당연히 의도한 것이겠지의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구멍이 너무나 많다.


살면서 많은 순간 그랬다구멍을 발견하면 매우고구멍이 났으면 채우고 왔어야 했으나할 수 없어서든 하기 싫어서든 남겨두고 온 구멍들이 많이 있다살면서 느끼고 지나온 감정의 구멍 역시 많다눈앞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으나 해줄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 대신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장난은 아니었고진심이었으나 안아주는 대신 휴지를 한 장 건넬 뿐이었다나는 하지 못했지만영화 속 이들의 포옹은 그런 것 같았다그 순간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감정들수많은 생각들그러면서도 생겨나는 구멍들을 안아줌으로써안김으로써 위로하고달래고매우고 있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깬 영호는 갑자기 차가운 겨울 바다에 뛰어든다그리고 소리친다. “어우 추워너무 추워!” 당연히 춥겠지앞서 그런 행위를 가짜로 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습니다.”라고 말했던 그의 말처럼 계산의 영역에서 벗어난 즉각적인 신체적 반응이다감희가 에무에서 보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바다가 여름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지만감희는 그 바다의 이미지를 보고 무어라 생각했을까영희는 그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해변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며 무어라 생각했을까그 생각들과 영호가 뛰어든 바다의 느낌은 같았을까인물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으로 패닝 해 퇴장하는 인물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대신 <인트로덕션>에선 서로 부둥켜안은 석호와 정수를 보다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끝을 맺는다. 60여분을 천천히 밀고 나아간 방식 그대로 끝을 맺는다덜컥 멈춰 선 포옹을 하는 것처럼 바다를 보며 말이다홍상수의 다음 영화에서 카메라의 방향은 바다를 향하고 있을까 인물의 얼굴을 보고 있을까아직 이 영화에 대해 내리지 못한 결론을 그때에 가서는 내릴 수 있을까.


#인트로덕션 #신석호 #박미소 #하성국 #예지원 #기주봉 #서영화 #김민희 #조윤희 #홍상수 #영화

작가의 이전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