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 chambre en ville, 1982
<쉘부르의 우산>(1964)이나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에서 볼 수 있던 천진함은 찾아볼 수 없다. <당나귀 공주>(1970)에서의 아방가르드함 역시 그러하고, <롤라>(1961)나 <천사들의 해안>(1963)에서처럼 여주인공이 어떤 상징이 되지도 못한다. 1955년 낭트에서 총파업이 한창이다. 완전 무장한 경찰들을 두고 시위대는 “경찰은 짭새 더러운 인간쓰레기”라 칭한다. 방패와 곤봉을 들고 있긴 하지만 최루탄을 던지는 쪽은 시위대다. 흑백의 이미지로 <레미제라블> 같은 오페라가 한창인 와중 창밖을 내려다보던 펠티에 부인(안나 게일러)에게로 카메라가 옮겨가니 화면에 색이 입혀진다.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된다.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시위대에서 평생 남작의 딸, 대령의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펠티에에게로 오니 색이 나온다. 펠티에의 한탄, 시위대의 갈등, 청춘들의 사랑 같은 것들 모두가 방에서 출발했다. 거리엔 감시의 눈이 많았으니 몰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정과 낭만을 품고 있는 이들에겐 색이 많고, 최루탄 가스가 흩날리는 거리엔 색이 없다. 영화 속 열정과 낭만을 품은 이들은 모두 이 펠티에 부인의 방으로 모여든다. 흔히 붉은색은 열정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펠티에의 방은 빨간 색이 넘쳐난다.
열정과 낭만을 품고 있다고 하나, 그들 중 누구에게도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쉽지 않다. 프랑스와(리샤르 베리)는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하지만 임신한 여자 친구 비올렛(파비엔 기용)에게 무책임하다. 비올렛은 무기력하기만 하며, 프랑스와가 그녀 대신 사랑하는 인물 에디트(도미니크 샌다)는 어딘가 난폭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프랑스와와 에디트의 관계는 사실 그들의 말과는 달리 매춘에 가깝다. 프랑스와도 거듭 창녀가 아니냐고 확인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영화 내내 알몸으로 모피코트를 걸치고 다닐 뿐이다. 남편 에드몽(미셸 피콜리)의 집착과 간섭에 대한 복수심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고 하기까지, 에드몽은 TV 판매원인데 에디트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곧 터질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다.
<도심 속의 방>은 <쓰리 플레이스 포 26>(1988)을 제외하면 자크 드미의 마지막 필모그라피다.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 세상은 숙녀나 공주, 천사 같은 수식어를 달기엔 혼란스럽다. 자유로운 삶, 구시대와는 다른 방식을 구가해왔다고 자부했으나, 한 손엔 카메라와 한 손엔 아름다움을 들고 있었으나, 그 시대를 마냥 찬탄하기엔 어렵다는 걸 알아버린 것일지. 혹은 아름답다고 스스로를 속인 것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프랑스와와 에디트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게 아닐지. 내가 느낀 환멸 중 어디까지가 드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