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dium, 2021
두말할 것 없다. <랑종>은 지루했다. 과연 나홍진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이토록 화제가 됐을 이유가 있겠는가? 공포 영화라 자처하는 이 영화는 실제로 공포스러운가? 샤머니즘을 다루는 이 영화는 그 샤머니즘을 잘 다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홍진은 영화의 제작을 맡았고, 작품의 원안을 썼다. 그 외엔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몫이다. 나홍진이 원안에 참여했으니 물론 <곡성>(2016)의 세계관과 유사한 점이 있다. 아니, 나는 <랑종>과 <곡성>이 완전히 같은 구조를 취한다고 봤다. 현재의 결과는 과거의 어떤 원인에 기인하는 인과율의 서사로 밀고 나아간다. 나는 인과율보다는 카르마라고 말하고 싶다. <랑종>의 큰 줄기는 인물들이 과거의 어떤 일에 대해 카르마를 처맞는 것이다. <곡성>에서도 그랬다. 무명(천우희)은 “니 딸 애비가 죄를 졌응게.”... “니 딸 애비가 남을 의심 허고, 죽일라 커고, 결국에 죽여브렀어.”...“시방 가지 마. 시방 가면 다 죽어. 시방 가면 니 식구들 다 죽는다고?”라 말한다. <랑종>이 다루는 것 역시 카르마다.
영화의 제목인 랑종은 무당을 의미하는 단어다. 사람은 물론 풀, 논밭, 심지어 벌레들에게도 모두 신이 깃들어 있다는 토속신앙을 믿는 지역으로 향한다.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 곡성으로 향했듯 이번엔 자욱한 안개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으로 말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선 ‘바얀 신’을 믿는데, 특정 가문의 여성들에게 대물림을 하며 신내림이 이뤄진다. 밍(나릴야 군몽콘켓)에게 신이 들린 것 같은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자 랑종인 이모 님(싸와니 우툼마)이 그녀에게 향해 상태를 확인하는데 역시나 심상치 않다.
<랑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집안 혈통 자체도 카르마가 된다. 두 개의 가문이 소개되는데, 첫째 오빠인 마닛 통와라(야사카 차이쏜), 둘째 언니 노이 통와라(씨라니 얀키띠칸), 그리고 셋째 님 통와라가 있고, 노이의 딸 밍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죽은 노이의 남편이자 밍의 아빠인 자는 야싼티야 가문의 인물인데, 야싼티야 가문의 남자들은 다들 비참하게 죽었다고 설정이 돼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신이 고용한 이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으며, 방직공장을 운영하다가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로 공장에 불을 지른 할아버지는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발각돼 자살을 했고, 아버지는 암으로 죽었다. 밍의 오빠인 맥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고 소개된다. 앞서 언급했듯 반야 신은 통와라 가문의 여성들에게만 대물림하며 신내림을 하게 되는데, 원래는 노이가 신내림을 받게 돼있었으나 그것이 싫어 님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자신의 속옷을 억지로 입히고, 신발에 부적을 넣는 등의 술수를 써서 말이다. 그런 노이는 반야 신을 부정하는 행위 중 하나로써 성당에 다니기도 한다. 노이와 님의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하는데, 님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고, 마닛의 자식은 아직 갓난 아이다. 밍만 남은 상황에서 노이는 이 카르마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밍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짐작하지 못했을까. 다시, 노이가 랑종이 되고 님이 가정을 이루고 민간인으로서 삶을 살았다고 가정했을 때, 밍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해당 신앙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우선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니 부모는 고통을 없애주고자 한다. 신이 들려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없애고자 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 자식의 상태는 더더욱 나빠지고, 현대의학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만 말하며 침대 하나만 내어줄 뿐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되자 부모는 그릇된 선택을 알면서도 감행하게 된다. 우린 이미 <곡성>에서 딸 효진(김환희)을 구원하기 위해 분투하는 종구(곽도원)를 봤다. 그리고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 역시 봤다. 민간인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보지만 실패하고, 뒤늦게 신앙인이 등장하지만 시간은 많이 지체돼있다. 이때 나홍진은 미끼를 던진다. 토속신앙을 다루면서 <곡성>에선 부제가 등장했고, <랑종>에선 신부가 등장한다. 동양의 귀신을 다루면서 성경의 이야기를 가져와서는 서양의 좀비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겠는가. 창의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잡했다.
<곡성>이 그래도 성취한 것은 연출진이 그것을 의도했든 안 했든 이례적으로 많은 이들이 영화의 해석에 달려들었다는 것일 테다. 나는 여태 <곡성> 때처럼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해석에 열중하는 모습을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일이 없다. 단지 그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홍진과 반종 피산다나쿤이 참석한 GV에서 관객들은 영화의 의미만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것이 영화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감독은 그리고 제작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의 수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관객들이 <랑종>을 두고 얼마나 <곡성>의 후속편으로써 기대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랑종>은 <곡성>에서 단 하나도 더 나아가지 못한 복제품이거나 아류에 불과했다.
<곡성>을 봤을 때도 그렇지만,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나 (나는 느끼지 못한)공포감은 연출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 아닌 미술팀과 분장팀이 심지어는 역겹게까지 보이는 것들을 실감 나게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공포로 다가오진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해석에 매달린 악의 존재에 대해 <곡성>과 <랑종>은 명확히 다른 지점이 있다. 일광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그리고 무명의 알 수 없는 정체들에 대해 던져대는 미끼. 그래서 효진에게 들어가 있는 귀신을 퇴치하는 건 어느 쪽인가? <곡성>을 떠나 공포라는 건 무지에서 오는 것일 테다. 엄습해오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 귀신이라는 존재 역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드라큘라가 마늘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전에 갖고 있던 공포는 덜해지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랑종>에서 공포감이란 것은 영화가 3분의 2 지점을 돌파할 때까지도 없었다가, ‘아 설마 이게 무섭다는 건가?’ 싶은 부분이 있었으니, 그저 잔인한 장면을 불쾌하게 전시하는 것뿐인 장면들이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삼류 공포 영화를 비싼 돈 내고,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뚫고 볼 이유가 있나 싶다.
비슷한 줄기에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2018)이 떠오르고, 영화가 취하는 형식에서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블레어 윗치>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하며, <R.E.C>(2007)는 아주 대놓고 따라 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R.E.C>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소방관과 함께 어떤 곳으로 향했다가 위험에 처하는 영화다. <랑종>처럼 다큐 제작진이 현장에 동행하며 핸드헬드로 촬영하고 인공적인 조명이 없는 곳에선 카메라의 조명을 활용하기도 하고, 불을 모두 끄고 녹색의 야간 모드를 쓰며 현장감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려 하지만 패착이다. <랑종>은 다큐팀이 현장에 가서 촬영한 것을 후에 다른 누군가가, 혹은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가 후에 편집한 모양인데 굳이 넣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넣어 놨다. 한국에서 뒤늦게 시도한 <곤지암>(2018)에서 그것이 주는 공포감은 생방송이라는 설정에서 오는 현장감이었다.
그들이 대상 앞에 있음은, 현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랑종>처럼 갑자기 카메라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돌려 영화에 계속해서 개입했다가 퇴장했다가를 반복하진 않는다. 대학 전공생들도 그렇게 찍지 않을 것이다. 중간중간 자막까지 넣어가며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친절하게도 전달하더니 마치 그들이 선택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놓치고야 만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이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무섭겠지.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않던 귀신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그런 그깟 원칙이나 직업윤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랑종>은 직업을 떠나 인간적인 윤리마저 포기하고 만다. 영화가 시작하고 밍네 일가는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시간이 늦어 조문객들은 돌아가고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다가 밍이 갑자기 맞은편에 있던 이에게 화를 낸다. 밍이 또 무언가에 홀린 듯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데, 그에게 창녀 같다고 한 모양이다. 무어라고 말했는지 카메라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밍의 말을 빌리면 그렇다. 밍에게 씌인 수많은 귀신들의 정체도 알 수 없고, 그 수가 얼마나 많은 지도 알 수 없다. 어떻게든 가장 저급한 형태로 관객에게 불쾌감을 선사하고자 작정을 했는지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는데, 문제는 “왜?”가 결여돼있다. 그저 악한 귀신이 밍의 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게 전부다. 밍은 인력소개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인과율로써 작동하던 것과 달리 밍만은 예외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상태가 악화된 밍이 일터에서 죄를 저지르는데 그것 역시 성적인 것이었다. 그 상대가 되는 남성들은 밍의 직장 동료들인지, 사적인 친구인지, 그 누구도 아닌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왜?”가 결여돼있다.
캐릭터 설정만 그런 게 아니다. 밍의 말을 빌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중 하나는 “거기가 아파. 아플 땐 밑이 빠질 듯”하다고 한다. 밍이 또 정신을 잃고 회사에서 잠들었다가 깨는 장면이 있다. 갑작스러운 고통과 함께 엄청난 양의 하혈을 한다. <곡성>에서 일광이 무명을 만나고 엄청난 양의 코피를 쏟고 피토를 하는 것과 같은 장면일까? 밍은 귀신에 들린 거지 체내에 어떤 질병이 생긴 게 아니다. 어쨌든 밍은 화장실로 향한다. <랑종>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한다. 밍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찍고 있던 이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밍이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 다 닫히지 않은 화장실 문틈으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래 귀신이 눈앞에 있는데 촬영이 중요하지 윤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밍은 노이가 기르던 강아지 럭키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끓여 먹는다. 굳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귀신은 산 채로 대상을 뜯어먹는데? 그럴 수 있다. “금붕어나 잉어를 키우는 사람들도 생선을 먹잖아요?”라고 말하던 노이가 카르마를 처맞았다고 볼 수 있다. 밍의 할아버지가 공장에 불을 지른 카르마를 처맞아 노이가 불에 타 죽었듯 말이다.
영화는 이미 랑종인 님과 이제 랑종이 될 밍이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나, 영화를 열 때의 님만 제 역할을 수행하고 밍은 그렇지 못한다. 님이 쌓아 올린 서사는 그 바통이 밍에게 넘어간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하나의 인물인 밍이 영화를 망쳤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에 밍이 등장하고부터 그 캐릭터 설정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게 날뛴다. 영화는 효진이가 결국 그렇게 됐지만 어서 밍이 발작을 일으키고 기이한 증상을 보이길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부터 샤머니즘이니 뭐니는 이미 안중에 없다. 용한 무당도 그녀의 몸에 들어간 귀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의 귀신이 들렸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보이는 어떤 행동들은 던지려는 미끼에 자신들의 뒤통수가 걸리는 꼴이다.
일광이 점괘를 잘못 봤듯, 님도 그런다. 그러나 일광에겐 흔치 않은 실수였고, 님에겐 계속해서 반복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에필로그 격으로 님의 인터뷰가 삽입된다. 그녀는 반야 신이 진짜 자신의 곁에 있는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자신이 밍의 상태를 고쳐줄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는 그리 대단한 랑종은 아니었다. 본인의 힘이 부족해 다른 랑종은 싼티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퇴장한다. 그렇게 대단히 큰 의식이 치러질 것 같았던 디데이를 하루 남기고 님은 퇴장한다. 님이 퇴장하고 영화 역시 다른 노선을 취한다. 님이 퇴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1부와 2부가 극명하게 갈린다. 퀴퀴하고 불쾌한 서스펜스가 그래도 서서히 다가오는가 싶었는데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랑종>이 주는 그 모든 것을 다 휘발되고 불쾌함만이 남는다.
장르적 특성뿐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도 설정한 서사를 제대로 쌓아 올리지 못한다. 가볍게 언급되고 그냥 흘러가버린 밍의 조상이, 그리고 아버지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같은 것 말이다. 보여주고 싶은 건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해 어디에서도 흥미를 느끼기 쉽지 않다. <랑종>은 어떠한 미끼도 제대로 던져보지 못하고 퇴장한다. 어떠한 공포도 선사하지 못하고 퇴장한다. 그저 빨간 피만 전시하고 퇴장할 뿐이다. 온갖 잡다한 귀신이란 귀신은 다 들린 밍을 연기하는 나릴야 군몽콘켓이라는 배우가 그 괴물을 대단히 잘 연기하길 바랄 뿐이다. 관객은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기승전결을 따르며 영화의 주인공에게 이입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엔 이입할 캐릭터가 없다. 캐릭터라는 단어 자체가 적용되지 못한다. 캐릭터로서 뭔가 쌓아 올리고 있나 하면 퇴장시켜 버린다. 다시, 영화는 잔인하고 불쾌한 이미지만 전시할 뿐이다. 다시, 미끼도 제대로 던져보지 못한다.
남은 건 출신도 불분명한 괴물이 화면에 남은 사람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이다. 살점이 뜯겨나간 모습을 전시하며 영화는 발버둥 친다. 직업윤리는 생각도 않고 관음 하던 카메라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카메라맨들에게 돌아가 샷을 날린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충격이란 것은 단지 피와 상흔의 전시뿐이다. 누가누가 더 잔인한 이미지를 전시하는가 내기하던 2010년대의 한국 스릴러물이 떠오른다. 2021년에 보기엔 너무나 식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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