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영화>

The Novelist’s Film, 2021

by 박종승

개봉과 함께 극장을 찾아 영화를 마주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는 데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무어라 확신할 수가 없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영화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에 한 번의 재관람이 있었으나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그의 전작들과 이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배우 김민희가 맡은 배역들, 배우 서영화나 기주봉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아니 화면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형성되는 어떤 분위기들, 실제 부부인 효진(권해효)과 양주(조윤희)가 극 중에서도 부부로 나와 보이는 모습들, 장소나 의미에 있어 겹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것들이 등장하지만 같은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소설가이지만 자신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과장하고 부풀린다고 느껴서 더 이상 쓰지 못한다는 준희(이혜영)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크게 알고 싶진 않았다. 시인 만수(기주봉)가 이야기에는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큰 힘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 것들 보다는,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단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나 화면에 등장하고 퇴장함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에 따라 발생하는 운동력에 대해 온전히 집중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준희가 후배 세원(서영화)을 만나러 그가 운영하는 책방에 갔다가 세원을 돕고 있는 현우(박미소)에게 수어를 배우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했다. 세 배우가 가만히 앉아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문장을 반복하여 수어로 말하는 동안 관객의 눈동자는 바쁘다. 같은 문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가르쳐주는 현우와 배우는 준희가 단어 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며 반복하는 동안 발생하는 차이나.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 세원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말이다. 이후 공원에서 박 감독 부부(권해효, 조윤희)와 준희가 길수(김민희)를 만난 장면도 하나의 컷이지만 배우인 길수가 어떤 기점 이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음에 “아깝다”라고 말하는 효진과 그것이 왜 아깝냐며, 그의 인생을 더 잘 알고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이냐며 쏘아붙이는 준희의 대립이 있은 후 부부가 퇴장, 길수의 조카 경우(하성우)가 등장할 때에도 그렇다.


소설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있던 준희는 영화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경우를 만나게 되고,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하며 “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한다. 어떤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는 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다.”라고 한다. 얼핏 홍상수가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를 준희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모르는 일이다. 영화 바깥의 홍상수의 생각일 수도 있고, 영화 안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준희의 생각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의 생각일 수도 있다. 단지 홍상수는 꾸며낸 무엇이 아닌 모두 “진짜”를 찍었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장면들을 보면서 눈이 바쁜 이유도 온전히 관객이 그 장면에서 무언가를 보고자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홍상수는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나 이후 <강원도의 힘>(1998)에서, 그리고 줄곧 한 자리에 카메라를 가만히 세워뒀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에서 함춘수(정재영)와 윤희정(김민희)이 처음 카페에서 대화를 나눌 때 같은 장면이 바로 떠오르는데, 심지어는 이쯤이면 장면을 나누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부분에서도 말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에서는 선화(박선화)의 집 현관에서 방과 거실이 보이는 위치에 카메라를 두곤 선화가 기르는 개를 따라 그 시선이 이동하기도 했다.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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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2013)에선 대뜸 은행나무를 보여주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영화를 만들기 훨씬 전에 이미 그곳에 있었으며, 홍상수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가만히 있는다. <도망친 여자>(2019)에서는 지나가던 고양이를 카메라에 담는다. 연출의 영역이 아닌 원래 진짜로 그곳에 있던 무엇을 카메라에 담았을 뿐이다. 관객은 알 수 없는 홍상수의 의도가 카메라에 담겼겠지만, 자신의 의도를 좀처럼 밝히지 않는 그의 영화를 보며 관객은 자신의 관념을 영화에 투영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지론 등이 장면에 담긴다.


우리는 모두 소설가다. 프로필, 명함, 자기소개서 등의 직업란에 소설가라고 적지는 않지만 우리는 언제나 소설을 쓴다. 말 그대로 신변잡기적인 그 소설에는 소망과 희망이 담길 때도 있고, 절망과 원망이 담기기도 한다. 근래 들어 나의 소설엔 후회가 가득한데 후회로 가득한 문장이 가득 차 한 페이지를 이루고 그 페이지가 쌓이고 쌓여도 후회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나에게 <소설가의 영화>는 후회가 담긴 영화였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 안에는 소설가인 준희가 만든 영화가, 그러니까 <소설가의 영화> 속 <소설가의 영화>가 있는 셈이다. 관객은 준희와 길수가 서대문구의 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까지 눈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인지 확신할 수 없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에서 해원(정은채)의 꿈을 보여줬듯 길수의 꿈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준희와 길수가 극장에 가기 바로 전 장면에서 길수가 술에 취해 잠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이유로 길수는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고 있었다. 박효진 감독은 그것이 아깝다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었다. 준희의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만족스러웠으나 그것이 표정에 잘 드러나지 않았는지, 혹은 영화를 찍기 전의 불안감이나 이전에 영화를 찍지 않기로 한 어떤 계기 같은 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같은 이유로 “길수씨 나왔는데 우리가 없으면 안 되니까.”라고 말하던 준희는 심지어 영화가 끝나기 5분 전 알람까지 맞춰뒀으나 길수가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나왔으나 그곳에 없었다. 길수와 함께 영화를 보지 않은 준희 역시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는지 알 수 없고, 역시 그것이 꿈인지 실제인지 알기 어렵다. 영화 속 영화, 실제 속 허구라는 경계를 사용하며 영화는 다양한 의미를 낳는다.


준희와 길수가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고 나서 분식집에 간다. 어떤 영화를 찍을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 창밖으로 웬 여자아이가 등장해 안을 바라본다. 그 시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영희(김민희)와 지영(서영화), 천우(권해효)가 머무는 호텔의 창문을 닦던 검은 사내가 떠올랐다. 다시, 그 소녀가 “길수씨가 너무 예뻐서 쳐다보는” 거라 말하던 것도 준희의 생각일 뿐이다. 창문이라는 경계 너머의 것에 자신의 관념을 투영시킨 셈이다. 스크린이라는 경계 너머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한번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소녀를 보러 문밖으로 나선 길수는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 속에서 햇빛을 받아 이목구비가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벽 너머의 길수와 소녀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소리도 들리지 않을뿐더러, 입모양도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 미지의 영역이지만 꼭 알아야겠다는 무엇이 보이진 않는다. 그저 그러겠거니. 길수와 소녀가 원래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소녀가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를 테면 길을 잃었다던가. 길수와 만나기 전 세원과 함께했던 준희가 다시 길수를 따라 세원을 만나러 갔을 때, “있는 그대로 얘기하죠.”라고 했던 것처럼 딱히 숨길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고, 그 영역의 소설은 개개인이 다 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길수가 자리를 뜨자 그가 먹던 비빔밥을 한 숟갈 떠먹는 준희를 보는 것, 그런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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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계 너머의 것을 다루는 것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였다. 세원의 책방을 찾은, 책을 살피고 있는 준희의 손이 클로즈업되고 화면 밖에서 “머리가 잠깐 하얘졌었다.”라고 말하는 현우에게 세원이 “이제 말도 안 해? 대답도 안 해? 너 왜 이렇게 까부니? 네가 왜 이렇게 까불게 됐어?”라 소리치는 것이 들릴 뿐이다. 이어 책방을 나간 준희에게 현우와 세원이 차례로 나오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상냥하게 구는 모습에서 당황스러움마저 밀려오지만, 그대로 영화가 계속 진행되는 통에 경계 너머의 것은 경계 너머의 것으로 두고 넘어오게 된다. 아니, 아예 다른 인물인 것 같다. 영화 바깥의 서영화가 영화 안의 세원이라는 인물과, 영화 바깥의 이혜영과 영화 안의 준희가, 영화 바깥의 김민희와 영화 안의 길수가 다른 것처럼, 화면 바깥의 세원과 화면 안의 세원도 다른 것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준희와 길수가 찍은 영화가 실제인지 꿈인지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 같다.


우한 폐렴이라는 말로 시작한 코로나 시국도 벌써 몇 해 째인데, 영화 안에서 인물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처음 본다. 그간 좀비가 되거나 다른 전염병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일을 많았으나 직접적으로 마스크를 쓴 것은 처음 본다. 심지어 실제로도 그렇듯 마스크를 턱에 걸치기도 하고, 잠시 벗어 손목에 끼고 있기도 하며 실제 모습을 담은 것 같아 보인다. 준희가 자신의 영화를 두고 말한 “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한다.”라는 것이, 홍상수가 말하는 진실성(integrity)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설가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영화 안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를 위해 열심히 밀고 나아가는 것일 텐데, 그 내용은 사실 술자리에서 준희가 가정한 것이었다. 길수의 생일을 남편이 까먹어서 화가 나 어머니한테 갔는데, 남편이 찾아와 레스토랑에 가 식사를 하고 기분이 풀려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한 것. 준희는 가정으로, 허구로 꾸며낸 것이지만 사실 길수의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것 말이다. 기록물로써 영화는, 영상은, 사진은 과거를 담는 것이다. 그때는 현실이고 실재이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은 과거의 것을 보는 것이다. 다시, 영화 속 영화를 보면 길수는 산책하다 만난 낙엽, 꽃들을 보며 “아깝다”라고 한다. 일전에 박 감독이 연기를 하지 않고 있는 길수에게 아깝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일까. 나뭇잎과 꽃은 1초만 지나도 과거의 것이 되어 시든다. 길수는 그 찰나의 것을 아깝다고 말한다. 영화 안에서 길수의 남편이 누구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화면 안에 등장한 적도 없고 그 이름이 언급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영화에서 길수를, 김민희를 찍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길수는, 김민희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와 대화를 나눈다.


너무 예쁘지. 색깔로 찍고 있어?

아니요.

흑백이에요?

네.

아깝다. 이렇게 예쁜데.

아니, 색깔로 찍으면 되죠.

사랑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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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영화였으나 그 진짜를, 실재를 담기 위해 감독은 작은 고민도 없이 바로 색깔을 입힌다. 흑백으로 영화를 찍기로 했으니 색을 입히는 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감독은 그러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안 되는 게 무엇이겠는가. 안 되는 건 없는 것일 텐데. 나의 후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았다. 야생화로 부케를 만들어 결혼행진곡을 부르던 그녀를 보며, 그런 화면에 바로 색을 입히는 감독을 보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영화 제작을 도운 경우의 말을 빌려 영화는 정말 특이하다.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의 관념이 작용하다, 그 무엇도 닿지 않을 실재가 등장하니 말이다. 그렇게 엔딩크레딧이 나오는데, 영화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흑백의 화면으로 상영관을 나오는 길수가 보인다. 사랑을 말하던,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안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던 남편은 사정이 생겨 동행하지 않았고, 그녀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영화 촬영에 참여한 이들 각자가 영화에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어떤 이유로 예정과 달리 길수를 기다리지 않았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을 만나러 옥상으로 간 길수는 준희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만나지 못하면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기록물로써 담기지 않은 모두의 과거는, 그리고 소설은 그렇게 계속 나아가고 있다. 모든 인물이 퇴장하고 카메라가 비추는 하얀 벽은 <원더풀 라이프>(1998)의 한 장면마저 떠오르게 하는 미지의 영역 그 자체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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