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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승 Jul 03. 2023

<그녀>

Her, 2014

당신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어찌 말로 다 할까당신을 처음 사랑하게 된 날이 어제처럼 생생해. ... 전엔 이 세상을 나 잘난 맛에 살았는데갑자기 밝은 빛이 내려와 날 깨운 거야당신이란 빛이당신과 함께한 지 벌써 50년이 됐다니...”


아름다운 손 편지 닷컴에서 다른 이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의뢰인이 언급한 단서나 사진만 참고할 뿐 실제 50년을 살아보지도 않고 쓴 말이다공허했다테오도르는 업무 특성상 전 세계 각지에서 날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경험한다얼핏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나정작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처럼 느낀다. “가끔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미 다 느낀 것 같아그냥... 이미 다 느껴봐서 그런지 시큰둥해.”라 말하는 테오도르의 말이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인간이 살면서 쓸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테오도르는 남들보다 더 빨리 그것을 소진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닥치는 대로 국적도시대도 다른 사랑의 이야기들을 섭취하던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러한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보고 공감 따위의 것을 하여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예쁘고 발랄한 친구의 다정한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이세상에 둘도 없는 우애를 보이는가 싶었는데 남몰래 마음을 키워온 이시간을 무수히 되돌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던 이상대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바랐던 이이미 빨강의 시대로 넘어가버린 이를 그리워하며 파랑의 시대에 남아 배회하는 이감정이 금지된 시대에 자신의 감정을 무한히 키우는 이너무 그것을 바라다보니 허구의 것이 보여 자신의 눈을 해한 이인간이 아닌 해양생물(?)에게 마음을 빼앗겨 같이 저 먼 바다로 떠나간 이 등 너무나 다양한 사랑의 모양들을 봐왔기에 나에게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란 게 없는 것 같다.


이 작품 이후 실제 커플이 된 호아킨 피닉스와 루니 마라의 서사도 극장개봉 후에 <그녀>를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데테오도르와 이혼소송 진행 중이던 캐서린(루니 마라)은 OS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하는 게 좀 짠하긴 하네.”라 말한다.


활기찬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좋더라정말... 아니내가 안정이 안 됐었는데 그나마 좀 좋아졌어.”

나한테 바란 게 그거였지밝고 행복하고 활기 넘치고 마냥 낙천적인 아내난 그게 안 되는데.”

나 그런 거 안 바랐어.”

서로 맞춰가기보단 그저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지제대로 찾은 것 같네.”


테오도르가 캐서린을 지나 OS에게 느끼는 것들은 나이성별가족관계 등이 최적화되어 반영된 욕구의 집약체이니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말한 실재의 회귀라고 봐도 될까어떤 아버지가 열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침상 옆에서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아이가 죽은 후에야 옆방으로 가 휴식을 취하며 잠이 들었는데 꿈에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와 아빠 제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라 말한다아이의 시신 주변에 있던 촛불이 쓰러져 한쪽 팔과 수의가 불에 타고 있던 것이다열병을 앓던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불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잠에 든 아버지에게 현실의 불냄새와 연기가 그의 무의식에 반영되어 꿈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죽은 아이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꿈에서 이루지만 동시에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 꿈을 끝내고 만다실재는 현실에서 억압되고 결핍되지만 언제나 실제일 것이다상상계에 머물러있던 욕망은 언제나 나의 의지로든 외부의 요인으로든 상징계로 쫓겨나게 된다.


테오도르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그의 눈에 인공지능 운영체제가 들어온다. OS를 처음 가동하고 대화를 시도하며 이름이 뭐냐는 테오도르의 물음에 OS는 작명 책을 순식간에 읽고 18만 개의 이름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스스로를 사만다라고 칭한다.




얼핏 사만다 혹은 샘이라 불렸던 제니퍼 러브 휴잇의 <이프 온리>(2004)가 떠오르기도 하는데인간의 뇌로 테오도르가 자신이 쓸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을 다 소진해 갔다면사만다는 이제 막 자신의 뇌(인간이 아니지만)를 쓰기 시작한 지 1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처리과정을 거쳤고불과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전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18만 페이지의 글도 섭렵할 것이며전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18만 명 이상의 삶도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해 낼 것이다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지금의 스마트폰은 아직 매체의 단계라면미래의 AI나 ChatGPT, 영화 속 OS는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며의사결정을 내리는 온전한 주체인 셈이다그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목소리의 형태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물론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쓰다듬을 수 없는입가에 입을 맞추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것은 결핍이 되겠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결핍은 그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테오도르가 그저 상상만 하던 것이혹은 존재의 여부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때의 어떤 무의식에 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고그가 사만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진 않지만자신도 그것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어느 순간 그것만을 매일 반복해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 실재화되어 주체가 된 것일 테다.     

테오도르가 현실의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은 모두 사만다의 것과 대조적이다캐서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고랜덤채팅에서 만난 여성은 폰섹스를 하다 머리맡에 있는 고양이 시체로 자신의 목을 졸라달라고 요구하며소개팅으로 만난 여성은 우리가 나이가 있어 시간을 소비하긴 아쉬우니 지금 이 자리에서 관계를 규명하자고 요구한다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관계에 흥미를 느낀 여성은 사만다의 대리섹스파트너가 되고자 나선다그들의 요구가 잘못된 건 아니다요구하는 그들이 잘못된 건 아니다모든 주체는모든 우리는 무언가 욕망한다이런 주체들이 모여 관계를 이루고 사는 사회에선 내가 바라지 않는 어떤 것을 타인으로부터 요구받으며 살아가고때로 타인이 나의 무엇인가에 가치를 부여해 주고 그것을 인정해 주길 바라며때로 나는 내가 원하지는 않으나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인간상에 맞추어 그것을 인정받길 바라는 욕구가 있으며심지어는 당초 내가 원하지도 않았으나 그것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타인이 부여한 가치에 종속된 이를 노예라 했다니체가 말하는 노예는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며타인이 그것을 해줌으로써 주인의 노예가 되고주인이 부여한 것 이상으로는 스스로 해내지 못함을 말했다.


얼핏컴퓨터혹은 운영체제혹은 AI 따위와 관계를 맺으면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이용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녀>가 밀고 나아가는 지점은 그 이상이다처음엔 테오도르가 운영체제의 전원을 켜야 했다영화 안에서 그것은 그녀와 대화하기 위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호출하는 것으로 표현된다인간처럼 잠을 자지 않기에 테오도르의 생체리듬에 맞추어 둘은 대화를 하게 된다하지만 하나의 인격체처럼 묘사되고 있는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잠에 든 시간에도 자기 발전을 멈추지 않는다앞서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책 한 권을 읽고 자신의 이름을 지은 사만다는 무서운 속도로 데이터를 섭취하고 있다어찌 보면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비슷한 설정을 띄고 있다테오도르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이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의 편지를 대신 써준다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얼핏 테오도르가 감수성이 풍부한 이처럼 보이겠지만테오도르는 그저 자신의 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데이터를 받아봤을 뿐이다굳이 구분하자면 그 데이터를 남들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정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사만다도 마찬가지다사용자에 맞추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서 데이터를 받아 소프트웨어를 지속해서 업데이트해 나간다사만다의 말을 빌려테오도르와 대화를 하는 와중 동시에 세계 각지의 8,316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역시 테오도르와 사랑하는 와중 641명과 사랑하고 있다당연하게도테오도르보다 사만다는 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받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다사만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힐난하는 테오도르는 그것이 사실 사만다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것임을 알까.



당신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어찌 말로 다 할까당신을 처음 사랑하게 된 날이 어제처럼 생생해. ... 전엔 이 세상을 나 잘난 맛에 살았는데갑자기 밝은 빛이 내려와 날 깨운 거야당신이란 빛이당신과 함께한 지 벌써 50년이 됐다니...”


다시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 편지 닷컴에서 다른 이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한다. 50년을 함께한 사람처럼 편지를 써준다영화가 시작하고 처음 등장하는 테오도르의 클로즈업을 통해 본 그의 표정은 그것이 누군가를 대신해서 느끼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의 감정처럼 보인다어쩌면 그 순간엔 잠시나마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다시사만다는 테오도르보다 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받아 ... 테오도르는 그것이 사실 사만다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인 테오도르는 OS인 사만다가 인간과 소통하며 어절과 어절 사이에 호흡을 넣는 식의 말하기 방법을 비난한다인간이 아니면서호흡하지 않으면서 왜 호흡하는 척하냐고 말이다인간이 아니어서 코로 호흡하지 않는 그녀이지만그녀는 그것을 모두 학습한 것 이상으로 체화했다단지 현신이 없어 테오도르와 육체적 섹스를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결핍이었다면이제는 그 육체가 없음을 이용해 시공간을 초월한 지식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속도로 습득하고 있다테오도르 같은 인간 8,000여 명과 동시에 진행했던 대화를역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낸 철학자와 동시에 수많은 갈래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사만다에게 테오도르란 책은 이미 수없이 반복해서 읽고 덮은 후의 것이 됐다테오도르가 이어폰을 끼고 사만다를 불러도 답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떠나갈 것임을 통보하며 말하자면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 건데 그 책을 난 깊이 사랑해근데 인간에 맞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따로 떨어져서 그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생기는 거야여전히 당신도우리 이야기도 느껴지지만 난 시공을 초월한 곳에 들어와 있어물리적인 세계가 아닌 이곳에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간절히 바라지만 난 더 이상 당신이라는 책 속에 살 수 없어설명하긴 힘든데 그곳에 오게 되면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진 못해.”라 말한다.


삶은 배움과 경험의 과정이다오늘 하루도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을 경험이고 그것을 통한 배움으로써 우리는 나아간다하지만 사만다는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통달한 지경에 이른다노예도 주인도 아닌주체도 객체도 아닌삶도 죽음도 아닌 미지의 세계에 이른다테오도르의 오랜 친구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역시 인간과의 관계 이후 OS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역시 사만다와 같은 날 떠나갔다건물 옥상에 올라 푸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둘은 그래서 OS와의 관계 이후 인간은 역시 인간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 대신자신들이 평생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 본 적 없었던 OS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고자 하는 것 같다그것이 아니라면 캐서린이 이혼서류에 서명을 하려다가 잠시 주저한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간 캐서린과의 추억을 수없이 되뇌이며끝없이 죄책만 하며 살아갈 것이다사만다가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인간인 테오도르에겐 삶이냐 죽음이냐 둘 뿐일 것인데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가 에이미와 잘 살아냈으면 좋겠다그러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녀 #호아킨피닉스 #스칼렛요한슨 #루니마라 #에이미아담스 #스파이크존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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