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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승 Aug 17. 2023

<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핵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어책은 핵무기 자체를 없애는 것이라 주장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서문에, 그리고 영화 <오펜하이머>(2023)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러나 단지 오펜하이머뿐만 아니라 나치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해야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 역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이라 불렸다. 원작 도서는 오펜하이머의 출생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온 아인슈타인처럼 버진 아일랜드의 작은 섬 세인트 존에서 말년을 보낼 때까지를 차례로 다루지만, 영화는 대학 이후부터 트리니티 실험까지와 1950년대 아이젠하워의 핵 정책에 반하며 보안 청문회를 받는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놀란은 1942년 미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가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찾아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설립해 많은 과학자들과 협업하는 시기를 현재로서 컬러를 통해, 이후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상무부 장관으로 선임하기 위한 청문회를 하는 시점을 과거로서 흑백을 통해 표현하며 과거와 현재, 원인과 결과, 빛과 어둠을 대조하며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2017)에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군인들의 일주일, 그 군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뱃길로 모여든 이들의  하루, 하늘에서 적의 전투기와 교전하는 한 시간을 교차로 보여주었고, <인터스텔라>(2014)에선 제2의 지구의 후보 중 하나였던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이 곧 지구에서의 7년이란 시간이었음을 교차로 보여주었었다. 놀란의 영화는 대개 그런 식이었기에 뒤섞인 서사의 구조가 낯선 것은 아닌데,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최근작보다는 오히려 그의 장편 데뷔작 <미행>(1998)이나 <메멘토>(2000)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미행>은 아주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A-B-C-D 순으로 촬영을 해놓고 C-B-A-D순으로 편집을 했고, <메멘토>는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의 시점이 컬러로서 시간 역순으로(4-3-2-1), 관찰자의 시점이 흑백으로서 시간순으로(A-B-C-D) 진행된다. 단, 역시 교차되어 4-A-3-B-2-C-1-D 같은 식이 된다. 하지만 스릴러로서의 <미행>과 <메멘토>와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전기를 다룬 드라마이기에 단순히 퍼즐을 맞추는 것에 힘을 쓰기보다는, 이미 작년부터 봐온 킬리언 머피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에,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그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담긴 표정이 무엇이었는지 알아가기 위한 순차적 단계로 느껴진다.


앞서 이 영화가 크게 오펜하이머의 청년기과 말년을 다루고 있다고 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는 1920년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원과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1940년대 그로브스와 뉴멕시코의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지어 트리니티 실험을 하기까지의 시기(1), 1954년 오펜하이머의 청문회(ㄱ), 1959년 스트로스의 청문회(A)라는 3가지의 시기를 다른 색감으로 표현한다. 다시 앞서 이용했던 도식처럼 쓴다면 1-ㄱ-A-2-ㄴ-B-3-ㄷ-C-4같이 될 것이다. 얼핏 복잡해 보이긴 하나, 역시 언급했듯 놀란의 전작들과는 달리 순차적인 단계로, 그래서 1로부터 4에 이르기까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 사건을 선형적으로 표현하며 (ㄱ)과 (A)는 (1)의 부연설명처럼 다가온다.



오펜하이머가 이룬 업적은, 그의 일생은 짧게 요약하여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하고 방대한 것이기에 원작인 평전은 1,000페이지가 넘으며, 영화는 3시간에 달한다. 아니, 영화는 겨우 그만큼에 불과하다. 앞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들’이라 했던 것처럼,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은 말 그대로 그가 주도한 것이지 오펜하이머라는 한 개인이 이뤄낸 것이 아니기에, 러닝타임의 꽤 많은 부분을 트리니티 실험 전후에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의 인격이,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사건들과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물에게도 할애한다. 그로브스 장군과 스트로스는 물론,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동생 프랭크(딜런 아놀드), 연인이었던 진 태틀록(플로렌스 퓨),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에 더불어 그와 협업했던 과학자들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디), 데이비드 힐(라미 말렉), 리처드 파인만(잭 퀘이드), 이지도어 라비(데이비드 크럼홀즈), 닐스 보어(케네스 브래너) 등과 로버트에게 공산당원과 좌파적 활동을 의심하고 공격했던 로저 롭(제이슨 클라크), 케네스 니콜스(데인 드한), 보리스 패쉬(케이시 애플렉) 등 조연과 단역에도 호화스러운 배우들의 이름 못지않게 영화 내에서도 굵직한 비중들을 차지한다.


아마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 심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맞는 것은 오펜하이머가 거의 유일한데, 다른 많은 이들이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많은 이들의 등장과 퇴장을 통해 오펜하이머가 갖는 심경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소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한데, <인셉션>(2010)에서 시공간이 붕괴하는 이미지나,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을 비롯한 우주의 신비, <덩케르크>에서의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발발 중인 전투를 표현하는 데에 쓰인 시청각적 에너지들이 모두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에 쓰였기 때문이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핵폭탄이 자아내는 버섯구름 같은 것을 표현하는 건 이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이 상대적으로 큰 공을 들인 부분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새파란 아이맥스 카운트다운 영상(크리스토퍼 놀란은 IMAX 포맷으로 영화를 찍었고, 그렇기에 IMAX 환경에서 영화를 본다고 가정하면) 이후 오펜하이머가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침대에 누워 파란 별들의 반짝임과 소멸 혹은 원자들이 끝없이 쪼개지고 폭발하는 것을 보는 이미지가 현실의 것과 화면비가 달라지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차라리 버섯구름의 표현보다 화려한 스펙터클일 것이며,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이후 로스 앨러모스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할 때 환호와 죄책감이 뒤섞이는 장면을 표현하는 데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놀란의 최근작들 보다는 초기의 <미행>이나 <메멘토>, <인썸니아>(2002)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많은 시간을 그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에 투자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략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독일계 미국인 그러면서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에 나가지 않으며, 미국 사회에서 합리적이면서도 진보적인,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기 위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해 “윤리적 상상력”을 가르치던 유대인 학교 애티컬 컬쳐 스쿨에서 노예 폐지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던 혁신주의적인 엘리엇이라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하버드에 입학할 때 학교가 오펜하이머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했지만 “그 돈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며 거절할 만큼 부유한 가정에서, 3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할 만큼의 천재였기에, 어려서부터 그에게 처한 어려움은 없어 고답적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 영향이 있었으며,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나 캐서린 맨스필드,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고, 미국에서 독일로,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날 때 단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모국어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양자 물리학의 개념들을 그 나라 학생들에게 강연할 수 있을 수준으로 익혔다고 한다. 영화에서 진과 연애하던 중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산스크리트어로 읽기도 한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큰 물리학의 토대 아래 실험 물리학과 이론 물리학이 나뉘어져 있음이 영화에서도 언급되는데, 오펜하이머는 실험에는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될 블래킷 교수(제임스 다시)에게 지도를 받게 되는데, 실험을 못하는 자신이 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자 실험실에 있던 화학약품으로 독을 만들어 그의 사과에 발라놨고, 결국 그가 먹게 되진 않았지만 대학 당국이 이를 알게 되어 살인 미수죄로 기소될 뻔했으나, 아버지 율리우스 오펜하이머의 로비와 런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리 된다.


1933년 헝가리계 미국인 실라르드 레오(마테 하우만)는 핵 연쇄 반응을 발견하고 이 폭발적인 에너지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하고자 했으나, 아직 명성이 크지 않았던 탓에 아인슈타인(톰 콘티)에게 부탁해 대신 전하게 된다. 1920년대부터 이어온 공황과,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의 영향으로 당시 공산주의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이 미국 전역에 퍼졌으며, 33년엔 히틀러의 나치스가 집권하게 된다. 루스벨트 이후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만)은 1945년 유엔 원자력위원회(UN Atomic Energy Commission)를 만들어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은 철저한 국제 검증 아래에 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미소 냉전이 진행된 1950년대엔 미 상원 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딴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공산당원 색출에 너 나 할 것 없이 가담했으며, 말년의 오펜하이머가 받는 취조는, 영화 속 텔러의 증언과 키티가 그와 악수를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독일의 나치스가 패망하고, 일본 역시 패색이 짙은 가운데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도 참전하겠다는 선언을 하자, 이미 승리가 눈에 보이는 와중 전후 소련의 힘이 커질 것을 우려해 미국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 그로브스가 트리니티 실험을 재촉하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폭탄이 투하된 이후, 8일에 소련이 참전 선언을, 9일에 나가사키에 다시 폭탄이 투하되기도 한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는데, 다소 복잡한 영화 구조와 더불어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끝내 충분한 보상을 준다.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놀란은 양자물리학을 포함한 담론들은 크게 어렵지 않게(<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의 원리를 펜으로 종이를 뚫는 것을 통해 보여주듯) 설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면서, 그 많은 인물들과 배경지식이 되는 서사들이 마치 영화에서 계속해서 설명하는 핵의 연쇄 반응처럼 분열하고, 퍼져나가는 식으로 같이 표현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화에서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와 같이 최초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로부터 까마귀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게 된다. 영화는 불을 선사받은 인간이 아닌,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를 조명한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별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만큼 매섭게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하던 발사와 동시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폭발로 이어진다. 마치 폭죽이 터지는 장관을 목격하는 듯한 이들은 구름 너머의 윤리적인 책임감을 잠시나마 잊은 듯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오펜하이머는 폭발 후의 피폭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같다. 겨우 선크림을 바르는 것으로 원자폭탄의 피폭에서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던 과학자들처럼 누구나  알지 못했던, 계산하지 못했던, 예상하지 못했던, 또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도화선에 심지가 서서히 타들어가듯 거의 0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의 모든 프레임은 압도적이고, 그 인물을 온전히 담아낸 킬리언 머피의 존재의 위력 역시 대단하다.


#오펜하이머 #킬리언머피 #에밀리블런트 #맷데이먼 #로버트다우니주니어 #플로렌스퓨 #크리스토퍼놀란 #영화


토해내듯 쓴 글을 뒤로하고 2차 관람하러 일어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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