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pose Of Love, 2005
연애라는 건 왜 하는 것인가? 연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겠기에 사전에 연애의 뜻을 알아보았더니 “물방울과 티끌이라는 뜻으로, 아주 작은 것을 이르는 말”(涓埃)이라는 뜻도 있고, “주로 봄날 햇빛이 강하게 쬘 때 공기가 공중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현상”(煙靄)이라는 뜻도 있고, “불쌍하게 여겨 사랑함”(憐愛)이라는 뜻도 있었다. 여기 유림(박해일)과 홍(강혜정)의 이야기를 보면 얼핏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戀愛)이라는 뜻이 어울려 보이긴 한다.
홍은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교생실습을 왔다. 그런 홍과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스물여섯의 유림이 담임선생이다. 홍은 애인이 있다. 그런데 유림도 애인이 있다. 홍은 남자친구가 “안정적”이고 “편해서” 좋다고 한다. 유림은 여자친구가 “자식 같고 부모 같다”고 한다. 홍은 과거 모종의 사건을 겪은 후 지독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증세로는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인데, 현재 그의 남자 친구는 그가 왜 그런지 도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잠을 못 자. 내가 재워줄게.”라며 그가 하는 짓이라곤 그저 팔베개를 해주고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것뿐이다. 심지어 의사씩이나 돼서는 말이다. 고기를 먹으러 가선 굽는 건 홍이 다 하고, 지는 먹기만 한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고기 더 시킬까? 나는 됐는데."란다.
사랑해 마지않는 <퐁네프의 연인들>(1991)의 알렉스(드니 라방)에겐 미안하지만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 반지를 낄 네 번째 손가락에 총을 쏴버리는 괴팍한 행위까지 필요 있겠는가. 역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의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색을 온몸으로 뒤집어써 파란색으로 염색까지 할 필요야 있겠는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이나 <세렌디피티>(2001)처럼 운명적인 만남 같은 거창한 말까지 언급할 필요도 있겠는가. 홍에게 필요한 건 그저, “왜 안 먹어요?”나 “왜요?”라 물어봐주고,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 많은 데 별로 안 좋아하나 봐요?”라 알아봐 주고, 그저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이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저도 그래요. 많이 나아졌는데, 비행기도 잘 못 타요.”라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이 아니면, 정상적인 사람 행동으로 그게 이해가 되세요?”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다짜고짜 “젖었어요?”라 묻는 유림이 후에 한 말이다. 유림의 언행이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면, 정상적인 사람 행동으로 그게 이해가 되기 어렵다. 아마, 2023년에 극장에서 이 영화가 개봉했다면 영화의 개봉을 반대하거나, 극장에서 상영이 중단되길 바라는 국민청원이 진행됐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찍이 자신의 감정을 17층 높이에서 떨어뜨려 죽여 버린 그녀에게 “난 다른 조개가 먹고 싶은데.”라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유림은 마냥 어린놈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한다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꼈던 남자는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녀를 스토커로 내몰았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홍을 음해했다. 아무래도 진심만이라도 알고 싶어 했던 과거의 상대와 다르게 적어도 유림은 그 목적만은 진실해 보인다.
유림의 어머니의 말을 빌려 “뭐든지 다 해주면서 키웠더니 남들한테 뭘 해줄지 모른다”던 유림은 홍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진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싶어 진다. 그의 첫 대사만큼이나 모든 것이 서툴고,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유림은 홍에 대해 더 알고 싶단 목적 아래 몰래 그의 물건들을 뒤진다. 다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홍은 유림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의 옆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잠이 안 와”
“같이 자고 싶어”
다시, 연애란 게 아주 작은 물방울과 티끌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어떻게든 침대로 데려가겠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봄날에 해가 강하게 쬘 때 공기가 공중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유림과 홍에게 피어나는 것 같다. 다만, 시간은 가고, 계절도 간다. 홍은 이미 봄을 지나왔기에 열렬히 뜨겁게 여름도 보내왔기에 이제야 봄날이라 생각하는 유림에게 거리를 둔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처럼 <봄날은 간다>(2001). 봄날은 간다. 은수(이영애)였다면 상우(유지태)에게 그랬듯 유림을 두고 떠났겠으나 홍은 시린 겨울날 손에 쥐게 된 손난로 같은 것을 놓기 싫다.
“여기서 끝내요 제발.”
“나도 미치겠어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어요. 유예기간이라도 줘요 최 선생님을 정리할 시간이요. 그때까지만 만나요. 그럼 지금 남자 친구하고도 안 헤어져도 되고 그때까지 최대한 마음을 정리할게요. 그땐 정말 최 선생님 안 괴롭힐게요.”
“그럼, 그때 가서 제가 그러면요? 제가 이 선생님을 그러면요? 그땐 어떡할 건데요?”
“그럼 그땐 제가 유예기간을 드릴게요. 네? 새싹이 돋는 봄 까지라던가.”
홍에게 유림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2012)에서 봤던 ‘코즈’ 과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리고 미숙했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열렬히 온 힘을 쏟았던 시기가 있었기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유림을 밀어내지 않았던 게 아닐까. 마침내는 유림 앞에서 오래간 숨겨왔던,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어 보이는 순간을 자신도 모르게 마주하게 되듯.
“너, 네 여자 친구가 너도 모르게 너 음해해서 너를 스토커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 일 있고 난 뒤에 밤엔 너무 무서워서, 견디기 무서워서 해뜨기 전까진 잠도 못 자. 내가 그 사람 못 잊는다고? 그 사람 손발을 다 잘라버리고 싶어. 그 와이프까지. 그 죄 없는 애새끼들까지도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우선, 유림의 언행이 잘못됐다. 하지만 둘의 상황은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유림은 여자 친구가 있지만 결혼을 하진 않았다. 오래 간 관계를 지속해 왔기 때문에 가족이나 자식처럼 느끼긴 하지만 결혼을 한 건 아니다. 홍 역시 편안하고 안정적인 남자 친구가 있긴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긴 했지만 결혼을 한 건 아니다. 선생이라는 직업 탓에 학교에 안 좋은 소문이 날 지라도 그들이 범법을 저지른 건 아니다. <밀회>(1945)도, <화양연화>(2000)도, <헤어질 결심>(2021)도 그랬듯 불륜은 파국을 맞지만, <연애의 목적>의 둘은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있는데 연애의 목적을 찾아 둘은 서로를 만난다.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다시, 연애란 게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것은 타자 속에서다. 자신의 욕망 자체가 실제 타자들 속에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타자가 될 수도 있다. 샤워를 하고 난 후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은 어느 정도 이상이 반영된 이미지일 수 있는데, 여러 이유로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도 늘 바뀌고 다를 수 있게 마련이니 타자가 될 수 있는 셈이고, 자신이 인지하는 자신과 타인으로 느껴지는 다른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 혼란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도 생겨나게 된다. 나르키소스(Narkissos)가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잡으려다 빠져 죽는 것처럼. 홍은 분명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잠도 실컷 자고 싶었을 테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싶었을 것이다. 외로웠던 유림은 그것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홍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을 수 있고, 상처 입은 홍은 유림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절실하게 내 마음을 누군가 쓰다듬어줬으면 하는 욕망이 내가 타인을 쓰다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표현의 방법은 잘못됐으나 그 목적이 틀렸다고 하고 싶진 않다.
“야, 너 불면증 맞냐?”
“난 너만 보면 졸리더라. 무슨 향수 써?”
“나 향수 안 써.”
“아냐, 너한테 항상 좋은 냄새 나. 이 냄새만 맡으면 잠이 와. 나 서울에서 한 번도 제대로 자본 적 없거든? 밤에 불 꺼놓으면 가위눌리고 악몽 꾸고 그래서 잠 안 자고 버텼다? 근데 푹 잘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
“오, 그니까 난 안 좋은데 나랑 있으면 잠이 잘 오니까 날 이용한 거네, 그지?”
“그런 거지. 넌 그런 존재야.”
홍과 유림은 서로가 서로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된다. 홍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 같았던 유림이 홍의 상처를 후벼 팔 때, 홍은 과거의 자신처럼 당하고만 있진 않는다. 서래(탕웨이)가 해준(박해일)에게 무너지고 깨어지게 했다가 평생의 미결로 남은 것처럼, 그녀의 이름이 붉을 홍(紅)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내내 빨간 상의 위에 어두운 색의 겉옷을 입어 홍색을 가리고 있던 그녀가 마침내 그것을 드러내고 얼굴에 생기마저 도는 것처럼 보이는 날을 되찾고, 유림은 다신 어떤 사람도 만나지 못할 것 같았으나 홍을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된다. 이유야 어쨌든,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유림과 홍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고픈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한재림은 <연애의 목적>이란 제목을 걸어 음담패설이나 늘어놓으며 연애의 목적은 섹스라고 말하는가 싶었는데, 홍과 유림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다 보니 내 마음도 움직였다. 미소 짓는 법을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홍이 미소를 짓고 차갑게 식어버린 강정이 든 도시락을 설거지하다 흐느끼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모종의 사건 이후 질색하는 유림의 팔을 잡고 “같이 잘래?”라 말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누구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하며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그들의 오늘은, 내일은 역시 밝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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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잠 잘 자. 너 없어도. 서울에서 몇 년만인지 모르겠어.”
“치, 잘됐네. 이제 진짜 나 필요 없겠네. 그니까 이거 놓으라고, 어? 잠 잘 잔다며, 그니까 놓으라고.”
“그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