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ine Morning, 2023
습하지 않은 마알간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 얼핏 ‘아- 날씨 좋다.’라는 생각이 들 법한 그런 날 산드라(레아 세두)는 퇴근길에 먹을거릴 사들곤 집으로 향한다. 적당히 생기 있는 나무와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들을 지나는데 흐르는 음악(Jan Johansson의 Liksom en herdinna)은 어쩐지 비루하다. 산드라가 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는데 현관문을 통과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게오르그(파스칼 그레고리)는 신경퇴행성 질병으로 인해 홀로 화장실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와중, 딸이 찾아왔는데 문을 열어줄 수가 없다. 게오르그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아니 문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문을 열기 위한 열쇠라는 존재가 떠오르지 않는다. 문 앞에 서서 문 너머의 딸에게 문이 어디 있는지, 열쇠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열리지 못하니 이렇게 갑갑할 수가 없다. 산드라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데, 그런 와중 아버지까지 살필 수 없어 요양원에 모시기로 한다. 마침내 운이 좋게도 원하던 요양원에 자리가 나서(요양원에 자리가 난다는 것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이가 죽었다는 것일 텐데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문하게 되는데, 새장이 눈에 보인다. “아빠, 새 좀 봐요.” 예쁜 새들이 새장 안에 있는 모습을 잠시간 카메라에 담는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새장 안에 갇혀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닐 수 없는 새들의 처지가 곧 사람들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 어딘가에 갇혀있는, 얽매여있는 이들의 모습. 영화는 산드라가 매일같이 맞는 출근하고, 딸을 키우고, 아버지를 간호하는 일상만을 보여준다. 대체 그 멋진 아침이란 건 언제 등장하나 싶을 정도로, 그의 삶엔 출구가 없어 보인다. 사각 프레임 안의 산드라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신의 의지로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지만,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모네의 <수련>이 한 화면에 담기지 못할 만큼 큰 크기로 전시되어 있지만 결국 전시장 안에, 그리고 커다란 프레임 안에 있을 뿐이다.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안에 우리는 갇혀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왜 누구도 이 여정이 딱 무엇이다, 어떻게 하면 된다라고 정의하지 못할까. 안에 들어와 보니 다르고, 또 밖에 나가보니 다르다. 안에 있다 보면 밖에 나가고 싶고, 밖에 나가있으면 다시 들어가고 싶다. 클레망(멜빌 푸포)은 아내가 있지만 산드라와 연애를 한다. 남의눈을 피해야 했기에 산드라의 집에서 만남을 갖지만, 처음엔 같이 침대에 눕는 것만으로 행복했지만, 이내 밖에 나가고 싶다. 전시장에 갔으나 일행이 아닌 군중 속의 개개인인 척한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나가기로 한다.
“하고 싶은 거 없어?”
“없는데.”
“나갈까?”
“부인 파리에 없다 이거지?”안 가고 싶어?
“여기도 괜찮잖아? 섹스하고 먹고 자고 충분한데.”
“난 아니야. 침대에만 있으면 지루해져.”
“그래? 여기까지네. 싫증 난 거야. 벌써.”
클레망은 곧 아내와 가족을 떠나 산드라와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말했으나,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한다. 산드라는 게오르그의 문을 열기 위해 게오르그에게 문의 위치와 여는 법을 설명해야 했다면, 클레망은 산드라의 문을 열고 들어와선 자신이 왜, 어떻게 나가겠노라 설명한다. 위로 올라보니 또 다르다. 아래층에 있었던 건 없다. 무언가 다르고, 있다가 없는 것이 반복되고, 그러다 보면 안에서, 아래에서 했던 건 밖에서, 위에선 하지 않는다. 좀 전의 안과 아래의 모습이 틀렸다 싶어 지금의 밖과 위에서 그때를 후회한다. 나오고, 오르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아래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저마다 기준도 다를 것이고, 시작 지점과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삶이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느 멋진 아침>엔 기승전결이 없다. 산드라가 슬픈 장면도, 기쁜 장면도, 힘에 겨운 장면도, 노는 장면도 다 비슷하게 찍었다. 숏의 길이도 비슷하다. 그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은 ‘강물은 흐른다’는 것만 빼면 매일이 다르다. 강물을 비추는 햇살이 달라 물의 반짝임이 다르고, 바람의 세기도 달라 유속이 다르고, 비가 와서 주변의 흙이 강물에 휩쓸려왔을 흙탕물이 됐을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도 세상 만물은 모두 변하는데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자신만이 실존한다는 것인데, <어느 멋진 아침>의 사유하는 이들은 모두 주변 인물들과 멀어진다. 클레망은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며 산드라를 떠났고, 산드라의 친척들은 게오르그의 안위에 대해 묻다가 결국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며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고민에 빠지며 산드라와 멀어진다. 흘러가는 삶 속에 게오르그는 산드라를 떠나가려 한다. 게오르그는 지금 자신에게 세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며, 연인 레일라와 자신을 말하곤 세 번째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한다. 멀어진다.
심지어 산드라는 자신이 내뱉는 말들까지도 그러한데, 그녀가 통번역가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직업상 그녀는 번역한 텍스트를 읽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화자가 영어로 말하면, 산드라는 그걸 듣고 청자를 위한 프랑스어로 말한다. 게오르그 역시 인지능력이 떨어지며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머릿속에서 부윰하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하루 종일 온 힘을 쏟는다. 긴 호흡으로는 못하더라도, 짧게 한 문장씩이라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지금 드는 생각들에 대해 글로써 기록한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사물의 아이러니.
이 병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날 벌한다. 독서.
많은 것을 상실했고, 상실하고 있다는 인식. “다신 그럴 일 없을걸."
깊은 심연의 느낌.
다른 이들과 멀리 떨어져 세상 밖에 있는 느낌.
내 목표는 글쓰기를 통해 병을 딛고 일어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것.
그것은 승리가 될 것이다. 빛이 있을까? 보이지는 않지만 배제하지 않겠다.
최악은 명확하지 않은 법.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이해하고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항복해야 한다. 그 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다."
칸트, 엘리아스 카네티, 한나 아렌트, 괴테, 프란츠 카프카 등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말이 흐릿해지니 산드라는 이제 게오르그가 아닌, 과거에 그가 읽었던 책들이 더 자신이 아는 게오르그라는 사람과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육체는 껍데기고, 이건 영혼이라고 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 산드라는 영국도 프랑스도 아닌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어느덧 두터운 코트를 입던 계절이 지나고 얇은 원피스를 입는 계절이 됐음에도 여전히 게오르그는 요양원에 있고, 클레망은 아내와 지내고 있다. 오늘도 힘든, 오늘도 눈물을 흘릴 산드라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올라 자신이 사는 파리를 내다본다. 제법 더워진 날씨에 내내 이어진 오르막길이 힘들지만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클레망이 있고, 보물 같은 딸 린이 그의 곁에 있다. 당장 내일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하루가 또 반복되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간 내 곁에 함께 있었던 이들과, 또 이들과 살아갈 세상이 있음은 확신할 수 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들과,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석양, 언덕을 내려올 때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도 있으니 제법 멋지지 않은가.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던 영화가 파리 전망을 내다보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맺는다. 그 찰나의 시간이라도 산드라에게 선물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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