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ra, 2024
다소 형식적인 3막 구조를 취하는 <아노라>의 첫 번째 파트는 <굿 타임>(2017)이나 <언컷 젬스>(2019) 같이 정신없이 펼쳐지는 이미지의 파편들 때문에 이제는 눈과 귀와 머리를 좀 쉬게 하고 싶다 싶을 정도의 것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애니(미키 매디슨)에게 어느 날 손님으로 나타난 러시아의 재벌 집 아들 반야(마크 아이델슈테인)는 그저 돈이 나올 구석에 불과했다. 애니의 말처럼 반야가 “1시간 치 요금”을 냈는데 한 번의 정사 이후임에도 45분이나 남았고, 다시 반야가 애니의 몸 위에 올랐음에도 역시 금방 끝나게 되자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은 절대 둘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철저히 쾌락에만 의존하며 안온하게 지내던 날들 중 반야의 청혼 이후 애니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둘이 진짜 사랑을 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애니가 반야에게 “조금 속도를 늦추면 좋아하는 걸 오래 즐길 수 있다”라고 알려주거나, 애니는 지하철이 내는 소음이 하루 종일 들리는 허름한 집과는 반대로 경제적인 자유를 줄 수 있다. 결혼이 두 사람 간에 오가는 어떤 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고받는 것이라면, 둘은 결혼을 했다.
구글에 이름만 검색해도 누군지 알 법한 반야의 아버지가 러시아의 거대 마약 딜러인지 아니면 총기 딜러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반부 로맨틱한 장면이 지나가고 애니가 벌이는 소동에 그녀가 과연 다리에 시멘트를 달고 바닷속에 던져지진 않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이것이 션 베이커의 영화이기 때문일까. 문제는 여기서 애니와 투톱으로 극을 이끌어갈 줄 알았던 반야가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고, 그 자리를 이고르(유리 보리소프)가 채운다는 점이다. 이고르는 러시아계 이민자로서 반야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 그저 애니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고르는 정말 그렇게만 행동한다. 션 베이커의 이전작들과 다른 점이라면 바로 이야기 안에 직접적으로 들어와 있는 이고르라는 존재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 무니 모녀가 처한 상황을 철저하게 관찰만 하던 바비(윌렘 데포)와는 다르게 말이다. 영화가 끝날 때쯤 상기한 건, 아노라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인 이고르가 영화가 시작하고 그 존재를 알게 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는 것이다.
이고르는 그저 반야 가족이 그에게 돈을 주는 고용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모욕한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지만, 역시 애니에게도 사과를 받아야 할 이유가 다분하다. 애니는 일련의 사건 이후 대가로 1만 달러를 반야 가족에게 받기로 했으나, 시간이 늦어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까지 이고르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애니는 여전히 반야 일가에게 당한 일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속해 있던 이고르에게 역시 적대적이지만, 그래서 퉁명스럽게 그의 이름을 조롱하지만, 강간범의 눈을 갖고 있다며 그가 반드시 자신을 강간했을 것이라며 말하지만, 둘이 조용히 담배를 나눠 피는 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연인>(1992)의 자동차 뒷자리에서 제인 마치와 양가휘가 주고받은 느낌 같은 것들이 영화 전반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시, 두 사람 간에 오가는 어떤 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고받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고르는 지금 애니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 담배뿐이다. 지나온 날들과 막막한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르나, 이고르는 지금 애니에게 줄 수 있는 게 그저 담배 한 개비일 뿐이다. 애니가 한 개비를 다 피우면, 이고르는 이내 다시 한 개비를 건넸다.
애니는 눈발이 내리는 겨울날 이고르가 밤중에 춥진 않을지 담요를 던져준다. 다시, 애니와 반야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했던 때의 모습을 상기해 보자. 둘이 나신의 상태인 장면은 제하겠다. 그럼 동태눈을 하고서 게임을 하고 있는 반야의 품에 매달리든 안겨있는 애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이 굵은 반지를 선물 받고 기뻐하는 애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끝인 것 같다. 서로가 상대방 자체에게서 의미를 갖는 장면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신체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둘에게, 그 춥고 외로운 밤에 둘은 서로의 신체를 걱정한다.
이고르는 자신이 반야 일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자신이 애니를 강간할 것이라는 인상을 준 이상 어떤 감정이 있더라도 더 이상 다가가긴 어려운 상태가 됐다. 영화는 시작했고, 끝이 나야만 했다. 날이 밝고 은행에서 애니가 받아야 할 대금(?)을 챙긴 후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는데 애니가 “이 차 꼭 당신을 닮았어.”라고 말한다. “마음에 들어?”라고 이고르가 물으니, 애니가 당연한 듯 “아니.”라고 답한다. 이고르는 나지막이 “우리 할머니 차야.”라고 말한다. 소련에 편입됐던 역사를 지닌 우즈베키스탄계의 미국인인 애니의 이름은 영화의 제목과 같은 아노라다. 아노라의 할머니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그런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애니는 러시아를 자연스레 익히게 됐다. 러시아에서 온 반야를 손님으로 응대하게 된 것도 그녀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것의 연장선에서 이고르의 할머니의 차에 타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뿌리를 둔 둘은 모종의 사건이 끝났으나 미국땅 위에서 딱히 다음 행선지랄 곳이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고르는 혼란한 와중 애니에게 결혼반지를 돌려준다. 그가 무언가 건넬 수 있는 것은 담배와 그것뿐이었다. 거꾸로 애니는 이번엔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조수석에 있던 애니는 옷을 벗고 운전석에 있던 이고르의 위에 오른다. 이고르는 애니에게 키스를 시도하지만, 애니는 처음 이고르를 만났을 때처럼 그를 때리기 시작하고, 다시 처음 그때처럼 이고르는 애니의 팔을 잡아 저지한다. 애니의 몸 안에 들어온 이고르는 그대로 멈춰있다. 두 시간 가까이 시끄러웠던 영화에 처음으로 정적이 흐르니 차 밖으로 내리는 눈발의 소리, 그리고 오래된 차의 와이퍼가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애니는 이고르의 위에서 흐느끼고 이내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애니와 반야의 관계가 발전한 것보다 더 갑작스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아직 23살인 애니와 바로 어제 30살 생일을 맞은 이고르에게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션 베이커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어떤 감정 섞인 시선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 내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나중에 보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났는데, 끝나지 않은 것만 같다. 애니, 아니 아노라와 이고르의 영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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