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utalist, 2025
“중요한 건 목적지지 과정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도 결국은 결과론적인 관점에서의 것이 아닐까. 지옥과도 같은 과정이 어찌 달성한 목적일지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으랴. 갈기갈기 찢어진 관계는 누가 어떻게 다시 이어 붙여줄 수 있으랴. 절대 그럴 수 없을 테지만 혹은, 그 지난한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럴 것이라 끝없이 되뇌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을 누군가의 말이 아닐까.
1988년생 젊은 감독인 브레디 코베의 <브루탈리스트>는 오프닝을 통해 쇼아에서 탈출한 이민자들이 엘리스 섬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선실 밖으로 나와 쓰러진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이미지를 통해 전쟁의 참상에선 벗어났으나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나아가 유대인으로서 고통받는 이야기일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또, 이 영화의 이야기와 인물은 허구이나, 애드리언 브로디가 분한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의 이름은 실재했다. 헝가리 출신의 지질학자 라즐로 토스는 1972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동상을 파괴한 인물이기도 하다. <브루탈리스트>의 이야기나 캐릭터가 그를 연상시키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브루탈리즘(Brutalism)이란 게 장식을 최소화해 단순화해 재료를 드러내고 그 기능은 유지하되 건축물 자체를 경험케 하는 것이랬다. 영화의 제목인 “브루탈리스트”란 것이 당연히 영화 속 그 형식을 취하는 건축가 라즐로를 칭하는 것일 테지만, 영화의 형식 역시 제목에서 이미 선언한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보이는 건 마틴 스코세지나 폴 토마스 앤더슨, 데미언 셔젤 같은 감독들의 영화들(<플라워 킬링 문>(2023)의 엔딩,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이야기, <바빌론>(2022)의 시도들), 특히 찰리 카우프만의 문제적 데뷔작 <시네도키, 뉴욕>(2007), 페데리코 펠리니의 상징적인 이미지들,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 같은 것들. 러닝타임이 짧지 않은 편이라 다양한 것들을 담아냈구나 싶긴 했어도 곱씹을수록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단지 차용하고 인용한 정도가 아니라, 엄숙하면서도 진지하게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호화로운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거칠고, 흠이 있지만, 아직 세공이 덜 된 것처럼도 보이지만 부정할 수 없이 묵직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많이 연상된 것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름이었다. 자크 리베트와 프랑스와 트뤼포가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도덕의 문제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단지 카메라로 그 시대를, 상황을, 인물을 담아내는 미학적인 단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단계의 것이라는 말이다. <브루탈리스트>는 긴 러닝타임임에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는 지점들이 꽤 있다. 미국의 백인 부르주아의 치부를 전부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더니, 정작 그 의도는 저 뒤로 밀어 두고 라즐로의 서사 자체에 집중하는 듯한 모양새도 그렇고, 겉보기에도 일부러 비워둔 것 같은 지점들도 있다. 소위 떡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시간을 들여 길게 설명하진 않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표면적으로 작은 부분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더 크고 많은 부분들을 상상하게 되는 건 문학의 영역일 것인데 이 영화는 그런 특징이 있다. 마치 오래되고 저명한 원작 소설이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이다.
오프닝의 기울어진 자유의 여신상도 그랬지만, 라슬로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찾아간 사촌 아틸라(알레산드로 니볼라)와 그의 아내 오드리(에마 레어드)와의 첫 만남도 심상치 않았다. 역시 라슬로와 같이 유대인인 아틸라는 이제 밀러라는 성을 쓰고, 아들도 아버지도 없으면서 “Millers&Sons 가구점”이라는 상호명을 사용하는 이유로 이곳의 가톨릭 신자들은 가족 사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다친 라슬로의 코를 보며, 다시, 미국인의 입장에서 낯선 생김새의 라슬로의 코를 보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아틸라가 밀러가 됐듯 라슬로의 정체성마저 고쳐지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후에 알게 되지만 오드리는 라슬로를 반기지 않았다. 낯선 생김새의 외국인이고, 이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녹아드는 것 같은 남편이 원래의 뿌리를 상기시키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내내 말을 하지 않는 조피아(라피 캐시디)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영화 속 시간으로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이스라엘로 향하는 여정들 후에 라슬로 부부를 대변해 청중들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영화에 처음 등장해서 거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말을 하지 않는(못하는 것인지) 조피아의 배경에 대해서 라슬로나 에르제벳은 설명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미 해리슨(가이 피어스)과 라슬로의 관계가 틀어지는 시점에 유럽에서 넘어온 에르제벳과 조피아였기에, 라슬로가 해리슨 일가에 조피아의 사정을 설명할 시기는 없어졌기에, 해리슨 일가는 조피아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조피아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 그 누구와도 접촉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이 영화의 서사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으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거꾸로 가장 바깥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조피아의 상황은 조피아를 포함한 어떤 인물의 말로도 설명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모두 설명이 되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빛 한 줌 들지 않는 선실 내의 라슬로를 보여주며 에르제벳의 음성이 외화면에서 들려온다.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아픈 에르제벳과 조피아는 짧지 않은 시간 갇혀있었다. 에르제벳의 말에 따르면 조피아의 외모를 예쁘게 본 그곳의 군인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지낸다고 했었고, 이후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조피아는 해리슨의 저택에 도착한 이튿날 따뜻한 물을 받아 욕조에서 목욕을 하며 욕실 밖 복도를 걸어가는 라슬로의 발걸음 소리에 안정이 된다는 에르제벳의 말 이후, 정원에서 수영을 하다 술에 취한 해리(조 알윈)와의 짧은 만남 이후 다음 장면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며 빠른 걸음으로 에르제벳에게 오는 조피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라슬로와 에르제벳, 그리고 조피아의 마지막 대화는 조피아가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환영하는 이 하나 없는 이 썩은 미국이 전혀 집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유대인으로서의 의무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속 1950년대에 조피아를 연기했던 라피 캐시디는 다시 늙은 라슬로 옆에서 조피아의 딸을 연기하고 있다. 휠체어를 탔던 에르제벳은 없고 라슬로가 대신 휠체어를 타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인물 간의 상황이 역전됐다.
에필로그에서 우리는 라슬로가 늙고 쇠약해진 것을 보게 된다. 시간이 흘러 시대도 배경도 달라진 상황에서 말을 할 수 없게 된 라슬로가 어떤 생각을 하며 그 건축물들을 구상하고 만들었는지 자신의 입을 통해 듣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유럽에서 미국에 막 도착한 에르제벳은 라슬로의 설계도들을 보곤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했었다. 에르제벳이 유럽에서 미국의 라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가장 자유롭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노예라고, 라슬로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남은 것은 무엇일까. 밴 뷰런도 없고, 에르제벳도 없고, 라슬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그 궁극적인 답은 영화를 본 관객이 결정하도록 빈칸으로 남아있다. 그 빈칸에 무엇이든 채워 넣을 여지는 무한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이 영화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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