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모터스>

Holy Motors, 2012

by 박종승

레오스 까락스 감독이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와 <나쁜 피>(1986), <퐁네프의 연인들>(1991), <폴라 X>(1999)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홀리 모터스>. 나는 <홀리 모터스>를 오늘로 두 번째 보았다. 첫 관람으로부터 한 6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첫 관람 때는 이게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면, 오늘은 꽤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사실 레오스 까락스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본 영화이며 역시 <퐁네프의 연인들>로부터 역순으로 그의 필모를 훑었다. 그리고 다시 <홀리 모터스>를 보기로 결심했다. 두 번을 봤지만 역시 어려운 부분은 존재한다. 그래도 6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으며, 데뷔작부터 찬찬히 봐온 것이 분명 도움이 됐으리라. 흔히 줄거리나 스포일러를 구분하여 말하기 어려운 영화들이 있는데, <홀리 모터스> 역시 그것에 속할 것이다.


관객으로 가득 찬 영화관의 이미지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 속 영화에선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들린다. 한 사내가 총에 맞은 것 같다. 이후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눈을 감고 있다. 영화가 너무 지루해 잠이 든 것인가? 이들 앞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이미지는 현실의 관객이 보는 화면에 나오지 않지만, 그 대사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킹 비더 감독의 <군중>(1928)일 것이다. 영화 <군중>의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고서도, 깨어있으나 눈을 감고 있든, 잠에 든 것이든 극장 안의 군중이 영화 <군중>을 보는 와중 그 위로 <홀리 모터스>라는 제목이 나타나는 건 꽤나 의미심장할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이미지에선 깜깜한 방 안에 잠들었던 사내가 일어나 벽으로 다가간다. 창문너머로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실루엣이 보인다. 그 방엔 침대가 두 개 있었으나 사내가 누워있던 침대 말곤 애초에 누구도 없었던 것처럼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정리돼있다. 그는 어느 포털에서 검색해도 똑같이 나오는 모습의 레오스 까락스 감독 본인이었다. 벽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가락 하나가 열쇠로 변하고 벽에 난 열쇠 구멍을 통해 문을 연다. 문을 여니 바로 앞 장면에서의 극장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잠에 든 것이 아니라면 죽은 것일까? 좌석들 사이로 난 통로로 갓난아기가 기어가더니,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형견이 그 뒤를 따른다. 상영관 안을 훑어보는 레오스 까락스. 그의 등장과 함께 숨죽인 극장 안에 생긴 동력. 그가 바라본 영화의 이미지일까. 뱃고동 소리가 다시 나며 하얀 벽에 난 동그란 창문 너머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는 창문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흰색 바탕에 동그란 검은 창문은 마치 사람의 눈 같기도 하다. 뱃고동이 나는 와중 창문으로부터 카메라가 서서히 멀어졌으니 이제 그 배의 풀샷이 보일 차례인가? 아니, 오스카(드니 라방)의 저택이다.


비서가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출근하는 유능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오스카는 길에서 구걸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모션 캡쳐 배우로서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오스카는 배우인 것 같은데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나 그에게 연기 디렉션을 하는 감독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스카는 비서 셀린(에디뜨 스꼽)이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여러 스케쥴을 소화한다. 이동 간 오스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다른 캐릭터로 분장한다. <홀리 모터스>는 그렇게 오스카를 따라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이 모인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처럼도 보인다. 구걸하던 노파 이후의 에피소드는 레오스 까락스가 2008년에 연출했던 <광인>의 캐릭터이기도 하며, 셀린이 영화의 마지막에 마스크를 쓰는 건 그녀가 스물세 살에 출연한 <얼굴 없는 눈>(1960)을 인용한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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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레오스 까락스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가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여전히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이런 말씀드리는 건 저희가 보기에는... 요즘 좀 피곤해 보여요. 이제 못 믿겠다며 불평이 들어와서요.” 오스카가 답한다. “카메라 때문이에요. 옛날에는 정말 육중했는데 우리 머리보다 작아지더니 이제 보이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나도 믿기 힘들 때가 많아요.” 사내가 다시 묻는다.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요?” “처음 시작은 연기의 아름다움이었죠.” “아름다움? 그건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른 거예요.” “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요?”


아름다운 것을 보는 사람이 없어져도, 그것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레오스 까락스 감독이 연인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의 죽음 이후에 만든 영화다. 그녀는 레오스 까락스 감독의 <폴라 X>에서 주인공 이자벨 역을 맡기도 했었다. 레오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의 엔딩 크레딧 중 그녀의 사진을 삽입했다. 이제 그녀는 곁에 없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미셸(줄리엣 비노쉬)이 “이제 그 약 먹지마. 잠자는 법을 가르쳐줄게. 약 먹지 않고 나와 함께 자는 법으로.”라 말하는 대사가 있다. 다시 오프닝을 보자. 레오스 까락스는 홀로 잠들어있다. 불면으로부터 숙면으로 이끌어줄 존재가 없어진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잠들어있었다. 아니, 잠들어있었나? 극장 안의 관객들처럼 단지 눈을 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스물 네 살의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해 극장에서, 스크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몽을 계속해서 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자동차를, 배를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겠으나, 문을 열면 언제나 미동도 없는 극장이 있을 뿐일 수도 있다.


오스카가 리무진에 올라 “오늘 스케쥴이 많아?”라고 물으니 셀린이 “9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그 에피소드를 쭉 적어봤더니 오스카는 1.구걸하는 노파, 2.모션캡쳐 배우, 3.광인, 4.소녀의 아버지, 5.아코디언 악단, 6.살인자, 7.은행원 살인범, 8.죽음을 앞둔 노인, 9.옛 연인을 만난 중년, 10.침팬지 가족의 가장으로 총 10개가 되더라. 오프닝을 바탕으로 9개의 배역에 관한 퀴즈를 풀어보고 싶었다.


레오스 까락스의 영화를 일컬어 흔히 ‘시’라고 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1991)이 3시간 57분에 달하는 산문이라면, 레오스 까락스의 영화들은 운문일 것이다. <홀리 모터스>를 제외한 20세기의 영화들은 시적이었으나, 시는 아니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 단지 길게 나열돼있기에 산문이라는 것은 역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산문시 역시 리듬을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홀리 모터스>에 리무진이 등장할 때마다 주인공 오스카는 다른 배역을 맡는다.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의 개연성은 없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들이 완전히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 외재율은 크게 없는 것 같지만 내재율로써 시의 형식을 갖췄다.


오스카는 리무진에서 매번 전혀 다른 캐릭터로 분장하고 등장한다. 그것은 레오스 까락스가 취한 영화적 설정일 수 있으나, 나는 이것 역시 레오스 까락스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으로서 대중들 앞에 나서는 레오스 까락스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가 방한했던 2009년과 2013년의 모습을 보라. 2008년 봉준호, 미셸 공드리와 협업한 <도쿄!> 때의 모습을 보라. 그 많은 사진들이 모두 같은 날 촬영된 것처럼 유사하다. 오스카가 하나의 캐릭터로 분장하고 그것을 연기하듯, 레오스 까락스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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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은, 오스카는 <홀리 모터스>에서 펼쳐지는 하루 간 아홉 개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이동한다. 아홉 번의 다른 인생을 사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홉 개의 각기 다른 다양한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 레오스 까락스의 지난 13년이 담겼으리라. 다시, 그의 고충이 담긴 에피소드를 참고해 오프닝 시퀀스를 보자면 눈을 감고 있는 관객들은 영화를 그저 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단지 보는 것 이상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 기술의 발달로 감상이 아닌 감각적 경험에 그치는 관람의 모습들. 레오스 까락스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카오스를 창조하고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영화를 만들게 한다.”고 말했다. 그의 필모를 보라.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보라. <나쁜 피>를 보라.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라. 오스카가, 드니 라방이 선보이는 괴상한 캐릭터들이 단지 ‘괴상하다’는 표현으로 설명될 것들은 아니다.


또 그는 “영화라는 것은 결국 낯선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낯선 언어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낯선 언어다.”라고 말했다. 오스카가 선보이는 아홉 개의 다른 배역이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고, 아마 미래에도 겪어보지 않을 인생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모두 내가 지닌 아홉 개의 단면일 수도 있다. 오스카의 마지막 배역은 침팬지 가족의 가장이다. 셀린은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보자고 한다. 다시, 오스카가 처음 등장한 그 저택 역시 침팬지 가족처럼 하나의 배역일 수도 있다.


은행원 살인 에피소드에서 오스카가 살인하는 은행원은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 또 다른 오스카다. 이전의 연기를 마친 뒤라 분장을 다 지우고 옷도 벗은 상태의 오스카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은행원은 겉모습에서의 차이가 존재한다. 오스카는 바로 전 에피소드에서 테오라는 사내를 죽이는 살인자 배역을 맡았었다. 현실의 오스카가 가상의 살인자를 연기하고 난 뒤,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또 다른 현실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다. 아니, 연기한 것인가? 그는 은행원을 총으로 쏜 뒤 “드디어 정리됐군.”이라며 이전부터 가져온 생각임을 말하지만, 셀린은 “어서 가요. 늦겠어요. 용서하세요. 약간 혼동이 있었네요.”라고 말한다. 오스카는 여러 번 총을 맞았으나 다시 일어나 리무진으로 향한다. 오스카의 세계가 현실이라면 이것이 가능한가? 은행원 살인과 오프닝의 저택 역시 하나의 에피소드로 계산한다면 총 11개가 되는 것이다.


다음 장면인 노인 에피소드에선 오스카만이 연기를 하는 게 아님이 밝혀진다. 그의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조카 역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임을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오스카의 현실과 그가 맡은 배역의 가상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광인 에피소드에선 앞서 언급했듯 레오스 까락스가 연출하고 드니 라방이 연기했던 <도쿄!>의 캐릭터가 차용됐다. 관객의 현실과도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소녀의 아버지 에피소드에서는 첫 파티라 춤도 추지 못하고 화장실에만 숨어있던 꼬마 아가씨 앙젤 역을 맡았던 진 디슨은 셀린 시아마의 <톰 보이>(2011)에서 비슷한 배역인 리사로도 나아간다. 다시, 앙젤의 핸드폰 벨소리는 카일리 미노그의 <Can`t get you out of my head>다. 카일리 미노그는 이 영화에서 오스카의 옛 연인으로 등장한다. 정리를 좀 해보자면 관객의 현실을 A, 오스카의 현실을 B, 오스카가 맡은 배역의 가상현실을 C라고 할 수 있을 텐데, A와 B와 C의 경계가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 영화에 있다.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었다. 오스카가 저택에서 나와 출근할 때, 그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이 있었다. 그들이 탄 검은 승용차가 하얀 리무진을 따라왔었다. 오스카가 노파로 변장해 사람들 앞에 나설 때까지 경호원들이 곁을 지켰다. 그러나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갈 때 그들의 존재는 사라졌다. 세 번째인 광인 에피소드에 이르러 오스카는 그에게 잡지 촬영을 요구하는 직원의 손가락을 물어뜯는다. 에피소드 2와는 다르게 CG가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현실성이 결여됐다. 에피소드 4에 이르러 앙젤이라는 딸이 등장하는데, 에피소드 1에서 저녁에 보자던 어린 딸과는 다른 인물이다. 뭐, 딸이 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피소드 1에서는 백발의 짧은 머리였다면, 에피소드 4에서는 조금 더 잿빛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다. 배역과 배역 사이의, 또는 현실과 배역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었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선 오스카는 역시 드니 라방이 분한 다른 캐릭터를 죽이고, 살인범의 모습과 똑같이 변장시킨다. 죽은 줄 알았던 또 다른 오스카는 자신이 오스카에게 당한 것과 똑같이 오스카를 죽인다.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은 외모와 같은 곳을 다친 두 오스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숏은 점프해 오스카가 해당 장소를 벗어나 셀린에게 향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게 둘 중 누구인 지 절대 알 수 없다. 오스카가 아닐 수도 있고, 혹은 말을 뒤집어 모두가 오스카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지점일 것이다. 에피소드 6의 은행원은 앞선 에피소드는 셀린의 말을 빌려 단지 혼동한 것일 수 있으나 계획된 9개의 배역과 우발적인 상황의 경계 역시 모호해졌다. 모호해졌다 대신 무너졌다라고 말한다면, 오프닝의 레오스 까락스가 극장과 스크린에 갇힌 모습이 오스카가 배역에 갇힌 것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제목 Holy Motors는 무슨 의미일까. 단순하게 직역하자면 신성한 모터(1. 전동기, 발동기 2.자동차 3. 모터가 달린)가 될 것이다. 셀린과 오스카의 리무진이 홀리 모터에 해당할까?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니 신성한 모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리무진에 타면 오스카고, 리무진에서 내려 새로운 배역의 가상현실로 이동한다. 카일리 미노그가 연기한 진은 다시 에바 그레이스라는 배역을 맡아 건물에서 투신자살하는 연기를 한다. 아마 앞서 은행원 살인 에피소드에서 총을 여러 방 맞고도 멀쩡하게 다음 배역으로 넘어간 오스카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셀린이 리무진의 문을 열어놓고 오스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성한 모터로서 리무진은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는 수단이었는데, 그 역할이 불분명해졌다. 혹은, 배역으로 흘린 눈물이 실재의 것과 같은 높이에 위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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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스카가 진을 만나 들어간 건물 안엔 망가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마네킹들이 많이 보인다. 너무나 의도적으로 배치돼있는 그 마네킹은 오스카가 바로 직전 에피소드에서 연기했던 죽음을 암시하기도 할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경계의 무너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진은 그레이스로서 죽음을 맞기 직전 오스카에게 “우린 누구였을까? 대체 누구였을까? 누구로 살았던 걸까? 그때 그 느낌이 느껴져...”라고 말한다. 오스카는 이후 진의 죽음을 보고 절규한다. 앞선 노인의 죽음 에피소드에서처럼 서로가 연기 중이란 걸 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말이다. 오스카는 침팬지 가족의 가장으로 하루를 마치려 한다. 그는 침팬지들에게 “앞으로 다르게 살 거야.”라고 말한다. 이전과 다르게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이 침팬지 가족과의 동침은 오프닝에서 갓난아기와 개의 배치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오프닝의 레오스 까락스는 손가락이 열쇠가 되어 문을 열었다. 손가락에 붙은 쇠붙이는 홀리 모터가 될 수 있을까. 손가락이 열쇠로 변하는 꿈인 것일까? 관객은 오스카가 여러 개의 배역을 맡아 보낸 하루를 지켜봤다. 연기와 실제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점에 진짜가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혹은 무엇이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스카에게 연기가 아닌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종반부 셀린이 리무진에서 내리며 가면을 쓰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레오스 까락스가 앞선 질문에 내놓은 대답일 것이다. 심지어는 인간이 사라진 차고에서 리무진들은 생명력을 갖고 서로 대화를 한다.


자, 내가 언급하지 않은 에피소드는 다섯 번째인 아코디언 악단뿐이다. 앙젤에게 “너 자신으로서 평생 그렇게 사는” 벌을 내리고, 자신과 똑같은 테오라는 사내를 죽이기 전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영화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고, 앙젤을 포함해 ‘나’로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위로이자 찬가처럼 들린다. <나쁜 피>에서 데이빗 보위의 <Modern Love>를 배경으로 골목을 내달리던 알렉스(드니 라방),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다리 위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펼쳐진 미셸과 알렉스(드니 라방)의 춤사위처럼 말이다. 폭죽처럼 에너지가 폭발하고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장면만으로도 나는 레오스 까락스의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하물며 영화 전체와 조화롭게 호흡한다면.


오프닝의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이미지는 곧 현실에서 <홀리 모터스>를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일 수 있고, 리무진 안 오스카의 이미지는 드니 라방의 이미지일 수 있고, 리무진 밖 오스카의 이미지는 드니 라방이 연기한 배역들의 이미지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진 채로 영화는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한 가지 행위를 하며 또 다른 행위를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다시, 레오스 까락스는 “영화라는 것은 결국 낯선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낯선 언어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낯선 언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홀리 모터스>는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한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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