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xtraordinaire Voyage de Marona, Maron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1997)에서 애로위(조디 포스터)는 18시간 같은 18초간 경험한 우주의 광활한 풍경을 보고 “시인이 왔어야 했다.”고 말했다. 시인의 어휘 라야 자신이 본 풍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상의 마로나>의 오프닝을 보고 난 바로 그 대사가 떠올랐다. “시인이 왔어야 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갈색 털을 지닌 개 마로나는 차에 치인다. 왜 흔히 죽음이 다가오면 살아온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하지 않던가. 마로나는 자신의 생을 영화로 보여주겠다고 관객에게 말한다. 마로나는 이전에 사라였고, 그전엔 아나였고, 태어난 직후엔 아홉이었다. 아홉에서 마로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녀의 목소리로 찬찬히 들어보자.
정우성과 김향기가 주연한 <증인>(2018)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 상황이 되지 못하는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해도 분명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래도 그들의 입장에서 조금 더 생각을 한 누군가의 시도 덕에 나의 생각도 어느 정도 한계의 틀을 흔들어 볼 수 있었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라는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간이 아무리 개에 대한 연구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분명 한계란 것이 있을 것이다. 같은 인간끼리도 명확한 한계가 아니던가. 극 중 마로나의 생각인 것처럼 나오는 내래이션도 리지 브로체르라는 인간의 목소리로 표현된 것이었다. 때로, 정말 마로나가 저렇게 생각했을까 싶다가도, 그것 역시 인간의 생각일 것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런 이유로, 마로나가 자신의 견생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인간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붙여진 이름,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새로운 역할들. 마로나는 다시 아홉으로서, 사라로서, 아나로서, 마로나로서 주인이 허락한 범위의 공간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제한된 활동범위가 그들을 옥죄는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문득 마로나를 보다 보니 나 스스로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그토록 분투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 목줄을 채워 다른 이의 손에 쥐어준 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가 네 명의 주인을 만나 겪는 일들을 그림자극, 서커스, 뮤직비디오, 회화, 그래픽 노블 등 다채로운 기법으로 표현한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에서 봤던 독일의 표현주의가 보이기도 하고, 프랑스의 아르 브뤼가 보이기도 한다.
보는 이를 단숨에 매료시키는 화려한 색감이 있는가 하면, 리지 브로체르의 내래이션은 더없이 정적이다. 감정을 아예 배제한 상태로 한 기계적인 내래이션은 아니지만, 음의 높낮이가 별로 없다. 이따금씩, 수 초간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그 침묵 너머로 전해지는 감정들. 들리지 않음으로써 들리는 많은 순간들이 <환상의 마로나>에는 있었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의 같은 대사로 시작하며 끝난다. “안녕, 내 이름은 마로나. 지금부터 내 얘기를 들려줄게.” 마로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할까? 당신은 마로나의 이야기가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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