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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이 싫다>

僕はイエス様が嫌い, Jesus, 2018

by 박종승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개된 포스터와 스틸컷의 인물들은 왜 그렇게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교실 안 어린 학생들의 모습인데 그들은 왜 뒤쪽을 보고 있을까? 영화는 호시노 유라(사토 유라)네 가족이 할머니네 집으로 이사하면서 시작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둘이서 사시다가, 최근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유라네 가족이 들어온 것이다. 유라의 학교도 할머니 댁에서 가까운 곳으로 전학을 하게 된다. 앞머리가 눈썹을 다 덮고 심지어는 눈까지 가릴 만큼 길어 유라의 눈빛을 명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꽤나 내성적인 성격 같았다. 반 친구들 앞에서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유라의 자리는 교실의 맨 뒷줄이었다. 다시, 공개된 스틸에선 유라를 포함한 아이들이 뒤쪽을 보고 있었다. 유라가 맨 뒷줄인데, 그 뒤론 아무도 없는데, 그들은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뒤를 돌아보는 것은, 지나간 시간 혹은 흘러간 세월을 돌아보는 것일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후회가 될 수 있다.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를 영화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4:3의 클래식한 화면비를 선택했다. 과거에 대한 언급을 하려는가 싶은 의문에 힘 있는 근거가 실리는 것 같았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이미 끼리끼리 다 친해져 있는 상태에서 전학을 왔기에 안 그래도 적극적이지 못한 유라는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가뜩이나 마음 붙일 친구도 없는 와중 전학 간 학교가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미션스쿨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고 출석을 부르자마자 예배를 하러 가야 했다. 예배에 앞서 한 학생이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을 낭송한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들을 구원하실 분이 태어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다.” 예배가 끝난 후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복도 창문 너머로 지켜보고만 있던 유라에게 교목(校牧)이 와선 말을 붙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일요일마다 예배를 하러 왔었다며, 필요하면 자신을 찾으라며 예수의 그림이 새겨진 카드를 건넨다. 카드엔 하나님은 능히 못하는 일이 없다고 쓰여있었다. 그렇게 등교 첫날이 끝나고 집에 가 저녁을 먹는데 할머니가 묻는다. 친구는 사귀었느냐고. 유라는 “응”이라며 거짓말을 한다. 그는 반 친구들 중 누구와도 짧은 대화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유라는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처음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할 땐 보이지도 않았던 그 눈빛이, 복도에서 운동장을 응시할 때엔 달랐다. 그렇게 아련할 수 없었다. 유라는 주변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니 자신도 손을 모아 본다. 그런데, 눈앞에 하나님의 형상을 한 무엇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웬 팅커벨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는 전지전능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니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유라는 “하나님, 친구가 생기게 해 주세요.”라며 기도를 한다. 영화가 시작한 뒤 19 분하고 30초가 조금 지났을 즈음 그렇게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나타난다. 영화가 시작하고 스토리에 대한 기반을 다지다가 20분이 지났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사건이 발생한다는 건 대학에서 혹은 이론집을 사서 영화의 구조를 공부할 때 기본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습작의 분위기가 풍겼다.


본디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닌데, 처음 예수를 마주한 유라는 그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유라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같은 반의 오오쿠마 카즈마(오오쿠마 리키)라는 친구가 다가온다. 유라의 앞에 나타난 존재는 정말 하나님인가? 영 미덥지 못한 유라는 또 다른 어떤 소원을 빌어 시험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돈 좀 주세요.”라고 한다. 밤이 깊어 이부자리를 까는데, 할머니가 와선 기특해하신다. 어린 손주의 행동이 무엇인들 예쁘지 않을까. 할머니는 유라를 옆에 앉히고선, 낮에 할아버지의 비상금을 발견했다며 천 엔(한화로 약 1만 원) 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보인다. 하나님이 유라의 소원을 한 번 더 들어준 것인지, 할머니가 유라의 행동을 어여삐 여겨 용돈을 주려는 것인지, 정말 할아버지의 비상금인데 시기가 우연하게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유라는 자신의 소원이 한 번 더 이뤄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나라면 어떤 소원을 빌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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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역시 세 번째 소원으로 무엇을 빌까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카즈마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유라의 모습이 뒤쪽에 배치되고, 그 앞에 같은 반 친구들이 지우개똥을 만들며 ‘오늘 밤 유성우가 내린대’라는 대화를 하는 걸 앞에 배치한다. 그 거리가 불과 1m 남짓한데 유라와 카즈마의 사운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유라는 카즈마에게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들을 얘기했을 수도 있고, 너는 소원이 뭐야?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어쨌든 영화는 유라와 카즈마의 소리를 부러 지우고, 대신 유성우에 대한 얘길 들려준다. 오쿠야마의 기억 속에 카즈마와의 대화는 남아 있지 않고, 유성우의 얘기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라는 유성우가 뭔지도 몰랐지만, 카즈마와 유성우를 보려고 밤에 다시 학교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교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유성우를 보며 즐거워했다. 유라와 카즈마의 우애는 깊어졌고, 크리스마스 무렵 카즈마의 별장으로 놀러 간다. 단지 눈밭에서 뛰어노는 유라와 카즈마의 모습을 보여주곤, 저녁 식사 자리로 옮겨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식탁 씬은 십자가를 그리듯 항상 균형을 이룬다. 사각형의 식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카메라가 위치하고, 좌우 어느 한쪽도 빈자리 없이 배치해 균형감을 형성하고, 가운데엔, 그러니까 카메라의 정면엔 항상 유라가 있다. 닭인지, 칠면조인지, 오리인지 알 수 없지만, 흔히 추수감사절의 식탁에서 보는 상차림이 있고, 유라는 덥석 수저부터 집어 들지만 카즈마의 어머니가 식전 기도를 하자고 한다. 다시, 유라는 전학 간 학교가 미션스쿨임을 잘 몰랐던 것 같았다.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유라에겐 생소했고, 예배가 학교의 공식 일정에 포함돼있고,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하물며 예수라는 존재는 말할 것도 없겠다. 앞서 언급했듯, 예수라는 존재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존재가 아닌데,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보며 의문을 품었었는데, 카즈마네 별장에서 그 의문은 풀렸다. 카즈마의 어머니가 식전 기도를 올리는데, 다시 한번 유라의 눈앞에 그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건 비 신앙인인 유라의 눈에만 보인다. 신앙인인 카즈마나 그의 어머니에겐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가 아니겠다.


다시, 나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인물들의 스틸컷을 통해 감독이 과거를 되돌아보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우리는 모두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정말 잘 알고 있다 생각해왔던 가까운 사람과도 어떤 대화가 어떤 분위기로 진행될지, 그래서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알 수 없다. 먼 미래의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다시,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하는 우리는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내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으로 과거를 바로잡아본다. 이미 흘러간 시간은 실제 세계에서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하다면, 영화로써 표현해볼 순 있지 않겠는가? 영화 속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로서 감독은 기억 속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1996년생인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의 <나는 예수님이 싫다>가 좋은 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다시 거기서 판타지를 일으켰다. 한 문장을 덧붙이자면, 절대 과하지 않게.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76분에 불과하다. 기왕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면, 조금 더 길어도 되지 않겠는가. 그 판타지 속에서 조금 더 행복해도 될 테고, 관객에게 조금 더 진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 영화적 장치를 더 넣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오쿠야마 히로시는 그러지 않았다. 영화 속 눈에 띄는 설정도 그리 많지 않다. 복선, 소원, 거짓말.


유라의 전학 첫날, 예배를 앞두고 교목은 강림절(降臨節) 2주 차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행사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2주 전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에서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꼭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들을 봐왔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시기에 영화가 시작해 그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복선이 될 수 있다.


새로 전학 간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이 기특했던 유라네 가족은 카즈마를 집으로 초대하자고 제안한다. 유라와 카즈마는 브루마블을 하다가 카즈마의 별장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된다. 유라가 별장에 대한 궁금증을 표하자 카즈마는 “안 돼. 가는 게 쉽지 않아. 너무 멀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곧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을 떠올렸었다. 별장으로 가는 길의 우여곡절이 나오려나 싶었다. 하지만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별장으로 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카즈마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냥한 카즈마의 어머니를 두고 유라는 “너희 어머니는 항상 웃는”다고 한다. 그러자 카즈마가 “항상 웃으면 무섭다”라고 한다. 바로 이어서 카즈마의 어머니가 해맑게 웃으며 등장한다. 그 숏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웃지 않게 될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앞서 언급했던 식전 기도에서 유라는 다시 한번 소원을 빌었다. 카즈마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으니, “소원은 얘기하지 않는 거래.”라며 비밀에 부친다. 거짓을 말한 건 아니지만, 가장 친한 카즈마에게 숨길 것이라면 후보군이 많지 않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위험한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골목길에서 공놀이를 하는 카즈마의 모습이 보인다. 불길한 예감은 어김이 없었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유라는 예수에게 친구가 생기게 해 달라고, 돈을 달라고 소원을 빌었었다. 비밀에 부친 소원을 하나 빌었고,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있는 카즈마에게 데려달라고 한 것이 네 번째였고, 결국 회복하지 못한 카즈마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마지막의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복선은 실현될 것처럼 해놓고 그러지 않았다가, 세 번째부터 그랬다. 처음 두 개의 소원은 기능의 여부를 테스트한 것이었고, 그 뒤로 세 개가 유라가 소원했던 것들이다. 1, 2번이야 반신반의하며 장난스럽게 시도한 것이지만, 세 번째는 자신이 소원했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그것도 들어준 예수가 원망스러웠을 거고, 마지막의 것은 예수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라고 쓰고 있지만 예수가 아니고, 실제 예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죽은 이를 되살려낼 순 없다. 유라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교의 예배당에서 카즈마의 장례를 치를 것이니 조문(弔文)을 읽어줄 것을 요청받는다. 유라는 선생님에게 말한다. “선생님, 기도했는데 소용없었어요.” 전지전능하다고, 열심히 기도하면 꼭 들어줄 것이라고, 그러니 기도하자고. 애초에 신앙인도 아니었던 어린 유라가 겪기엔 결코 작지 않은 딜레마일 테다. 조문을 읽으며 유라는 웃음기라곤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카즈마의 어머니를 목도한다. 조문을 다 읽고 기도를 하려는데, 카즈마의 회복을 위해 기도를 하려고 애타게 부르짖을 땐 나타나지도 않던 예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왜 그딴 소원을 들어줬냐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책망하고 싶을 것이다. 유라는 기도를 위해 깍지 꼈던 두 손으로 예수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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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유라는 영화 속에서 네 번의 거짓말을 한다. 전학 첫날 친구를 사귀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그렇다고. 관객은 분명히 유성우를 보고 즐거워하는 유라와 카즈마의 모습을 봤다. 하지만 조문에선 밤새 유성우가 내리지 않았으나, 본 체하며 즐거워했었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찾았다는 할아버지의 비상금 천 엔으로 죽은 카즈마를 위해 꽃을 사러 갔을 때, 꽃집 아주머니가 “심부름 왔니?”라고 묻자. “네.”라고 한다. 본인의 의지로 꽃을 사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라는 심부름이라고 답했다. 왜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유라는 잠결에 집 앞에서 눈밭에 찍히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깬다. 그리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나는 바깥을 본다. 실제 유라가 봤을지 분명하지 않은 장면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바로 유라와 카즈마가 처음 만나게 됐던 학교 운동장의 모습으로. 다시, 그 모습 이전에 학교 한편에 있던 닭장을 뛰쳐나온 닭을 먼저 보여준다. 유라와 카즈마는 그 닭을 쫓으며 마주하게 됐었다. 닭이 교정에 쌓인 눈에 발자국을 찍는다. 그런데, 닭이 나아가는 방향으로는 발자국이 남는데, 그 닭이 그 위치에 오기까지의 발자국은 없다.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 내던져놓은 것처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다시 한번 되돌아갔다. 유라와 카즈마가 처음 만났던 때로. 예수가 생명은 되살리지 못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그럼 영화적인 표현으로써 유라와 카즈마가 처음 만났던 장면으로 되감기를 한 것이다. 다시, 유라는 잠결에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바깥을 내다봤다. 그리곤 이 장면이 펼쳐졌다. 나는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이건 완벽해질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선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0.01%라도 완벽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되감기를 할 테다. 그래서 이 장면은 거짓이 될 테다. 유라가 한 거짓말들은 영화 외부에서 감독이 부린 마법이다. 유라는 전학 첫날 친구를 사귀지 못했지만, 오쿠야마는 친구를 만들어줬다. 할아버지의 흔적으로써 교목이 건네준 카드도 있고, 눈앞에 나타난 예수라는 존재도 있었다. 유라와 카즈마는 그날 밤 유성우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관객은 분명히 유성우를 봤다. 무어란 말인가. 교실에서 유라와 카즈마가 바라보던 창문의 모양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창문은, 유라가 구멍을 뚫어 보던 창호지 발린 문의 모양과 유사하다. 유성우는 감독이 부린 마법이다. 천 엔을 주고 산 꽃. 오쿠야마의 기억 속 자신은 꽃을 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유라에게 대신 꽃을 사게 했을 수 있다. 마법은 아닐지라도, 지난날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한 산물이겠다. 그래서 유라는 심부름이라고 답했을 수 있다.


유라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유라의 잠자리는 할머니의 옆이었고, 할머니가 불단에 할아버지 사진을 올려두고 기도를 할 때 그 옆자리 역시 유라가 대신한다. 할머니는 유라와 함께 창호지를 교체하려 한다. 그런데 창호지에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있는 게 아닌가. 유라는 할머니에게 이유를 묻지만, 할머니는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않는다. 다시, 유라는 잠결에 창호지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그 구멍을 들여다본다. 오쿠야마는 영화에 자신의 과거를 투영했고,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수단으로 삼았다. 과거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후회를 생각하며 몇 개의 장치를 넣었다. 유라의 할아버지라고 그런 순간들이 없었을까. 어린 유라에겐 카즈마와의 사건이 창호지에 구멍을 뚫게 하는 처음의 것이었겠지만, 유라보다 몇 곱절을 더 산 할아버지의 삶에 구멍이 열댓 개라도 이상할 게 없다. 유라가 할아버지의 흔적을 들을 거쳐 할머니 옆의 이부자리, 그러니까 원래의 할아버지의 자리에 드는 것은 의도된 연출이겠다. 유라는 할아버지의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방식을 체득했다.


거짓을 자꾸만 말하다 보면, 자꾸만 생각하다 보면 그것을 현실처럼 여기게 되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유라의 상황은, 오쿠야마가 의도한 것은 그게 아니리라. <중경삼림>(1995)의 표현을 빌려, 오쿠야마는 자신의 과거를 <나는 예수님이 싫다>라는 유통기한만 년짜리 통조림에 넣은 셈이겠다. 언제라도 통조림 뚜껑을 따서 다시 할머니 댁으로 이사 가던 날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시네마 천국>(1990)의 엔딩을 빌려, 그 기억의 파편들을 <나는 예수님이 싫다>라는 필름 안에 넣어 언제라도 카즈마와의 기억을 추억할 수 있고, 언제까지라도 그 후회스러움을 잊지 않을 수 있겠다. 관객이 보는 영화의 형태도 그렇다. 작은 프로젝터의 구멍으로 나온 빛을 네모난 스크린에 담아내지 않는가. 유라는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영화를 보는 것이겠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작품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여럿 있었다. 아무래도 영화에 출연한 아역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가 큰 이유 이리라. 러닝타임이 76분인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장편 치고는 상당히 짧은 편이다. 게다가 감정선의 폭이 크지 않아 잔잔하게 흘러가는 와중 그것이 한 번 폭발하는 장면이 있다.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이 영화의 각본과 촬영, 심지어 편집까지 도맡아 했다. 오쿠야마는 이 영화를 내내 픽스드 카메라로 찍었다. 그러다 한 번 트래킹을 하는데, 유라가 카즈마의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유라는 예수에게 소원을 빌어 카즈마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병상에 누워있는 카즈마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마침 병실 바깥에 있는 카즈마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말처럼 항상 웃고 있던 그녀가 감정이 격양된 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왜 오지 않느냐며,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며 질책하고 있었다. 카즈마의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다. 유라는 항상 웃고 있던 그녀가 웃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를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온다. 병원의 초입까지 걸어 나온 유라는 내리막길에서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한다.


다시, 이 영화는 십자가를 그린 듯 앵글이 항상 균형을 이룬다고 했다. 내내 지속되던 픽스드가 트래킹으로 변했듯, 이번에도 그 앵글 역시 균형을 깨트린다. 감독이 그 장면의 표현을 배우에게 온전히 맡기고자 했다면 그 울부짖는 얼굴을 정면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아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그의 표정이 잘 보이는 정면의 풀샷이어야 했을 것이다. 자비에 돌란의 <마미>(2014)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육성재가 드라마 <후아유>(2015)에서 전동 휠을 타고 마치 <박하사탕>(2000)의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것 같았던 그 장면도 있다. 하지만 오쿠야마는 유라의 오른쪽에서 찍었다. 유라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유라가 화면 중 어디에 위치하느냐만 변할 뿐이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유라의 방향은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열심히 달리던 유라는 점차 화면의 중앙으로 이동한다. 어린 유라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일일 테다. 유라는 한 번 더 왼쪽으로 이동한다.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오쿠야마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영화다. 달리는 유라의 곁에 오쿠야마가 있다. 처음에는 나란히 달렸으나, 스물두 살의 달리기와 열 살의 달리기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과거를 바로잡고 싶은 오쿠야마는 유라를 이끌어주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는 현실처럼 그 차이를 매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유라는 집에 도착해서 기도를 하려고 아니, 소원을 빌려고 두 손을 모으지만 예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쿠야마가 매울 수 없는 세월처럼,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의 <나는 예수님이 싫다>에 더욱더 애착이 간 건 이 장면의 공이 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떠오르던 장면들 중 하나이기도 한데, 1990년생인 야기라 유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아무도 모른다>(2004)를 통해 제57회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야기라 유야가 남우주연상을 두고 경쟁했던 후보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브래드 피트, <안티크라이스트>의 윌렘 데포, <피쉬 탱크>의 마이클 패스벤더, <페이스>의 이강생, <부서진 포옹>의 조세 루이스 고메즈도, 그리고 <올드보이>의 최민식 같은 쟁쟁한 성인 배우들이 있었다. 물론, 열네 살 소년의 연기라곤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빛나게 해 준 것은 고레에다의 공헌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 배우의 감정을 가볍게 소비하지 아니하고, 그의 연기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영화에 담아냈다.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 역시 아역 배우 사토 유라에 대한 배려가 담긴 방식을 취했다. 불필요한 장면을 구태여 찍지 않았다. 그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나는 예수님이 싫다>로 제 66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2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수상했다.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의 신인감독상은 2003년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으로 수상한 바 있기에 더 눈길이 간다.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은 제 29회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최우수 촬영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이뤄낸 결과라니 믿을 수 없다.


오늘만큼은 내 방 창문이 유리로 돼있는 게 태어나 처음으로 싫다. 나도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보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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