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Lovers, 2008
Two Lovers, 2008 "우리는 고객님들을 사랑합니다(WE ♥ OUR CUSTOMERS)“라고 새겨진 세탁물을 들고 가던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주마등처럼 미안하지만 떠나야겠다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더니, 이내 물 위로 올라와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스스로 뛰어내린 게 아니라고 한다. 래너드가 본 주마등같은 이미지에서, 그 여인은 ”떠나야만 해(I have to go)“라고 완강하게 말한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래너드는 스스로 뛰어내렸지만, 사람들에게 빠졌다고 말한다. 래너드는 과거 약혼을 한 상태였는데, 둘 다 타이작스(Tay-Saches)병이라는 DNA결함을 갖고 있어 이별하게 된다. 아마도 래너드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약혼녀도 원치 않았을 수 있지만 이별을 고했다. 래너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헤어졌고, 뛰어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뛰어내렸다. 타이작스병은 자식에게 유전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상황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마도 래너드의 부모님도 보균자일 수 있다. 래너드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래너드의 여러 상황은 그가 어딘가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언급한다. 심지어 래너드는 그것으로 인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의 방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포스터가 걸려있으나, 그것은 그의 독립, 탈출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단지 판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산드라(바네샤 쇼)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세탁소를 인수하기로 한 부부의 딸인데, 여러모로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캐릭터다. 그녀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좋아한다고 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얼핏 봐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는 대조적인, 아주 가족적인 영화다. 심지어 아주 친절하게도 산드라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사운드 오브 뮤직>이 좋다고 말한다. 래너드에겐 결핍돼있는 무언가를 산드라는 채워줄 수 있고, 아픔을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그녀는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단순하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투 러버스>였다. 바로 다음 이어지는 장면에서 래너드의 앞에 미쉘(기네스 팰트로)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웃에 살고 있는 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이 아주 불같아서, 여느 때처럼 화를 내고 있는 그를 피해 아파트의 복도에 나와있다가 만난다. 미쉘은 산드라와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미쉘은 래너드와의 첫 만남에서 산드라처럼 래너드의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스스로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라고 말하며,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마약도 하는 인물이다. 래너드는 분명 여러모로 결여돼있는 인물이었고,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산드라와 미쉘을 동시에 만나기 시작한다. 산드라와 만나며 채워지지 못한 것을 바로 이어서 미쉘을 만나 채우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보다 미쉘에게 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래너드의 직업이라고 볼 순 없지만, 유일한 취미는 사진 촬영이다. 산드라와 미쉘 모두 그의 사진에 관심을 표하지만 영화 속에서 래너드가 찍은 사진이 나오는 건 산드라의 것이 유일하다. 심지어 산드라는 카메라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 래너드가 미쉘을 찍을 땐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몰래 찍는 것이었다. 산드라는 카메라를 응시했고, 미쉘은 그저 카메라에 담겼을 뿐이다. 다시, 래너드는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을 산드라와 미쉘에게서 채우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산드라는 래너드의 것을 채워줄 수 있으나, 미쉘은 산드라에 비할 게 되지 못한다. 오히려 래너드가 미쉘을 안아주는 상황에 이른다. 래너드는 그것과 별개로 미쉘의 매력에 조금 더 끌리지만, 미쉘은 래너드를 남성으로서가 아닌 오빠처럼 지내고자 한다. 산드라는 래너드를 안아주고, 래너드는 미쉘을 안아준다.
이는 이들의 섹스씬에서도 드러난다. 미쉘은 애인과 오페라를 보러 간다. 둘의 사이에 낄 수 없었던 래너드는 오페라 CD를 사다가 집에서 듣는다. 그 때 산드라가 래너드를 찾아오게 되고 침대로 향하게 되지만 오페라는 여전히 재생중이다. 래너드의 앞엔 산드라가 있으나 그의 머릿속엔 미쉘이 있다. 섹스 후 래너드는 산드라의 품 안에 있다. 미쉘과의 만남에서 받은 또 다른 상처를 산드라가 안아줬으나, 이후 래너드는 미쉘의 상처를 안아준다. 산드라와 래너드의 위치가 그랬듯 이번엔 래너드가 미쉘을 안아준다. 다만, 래너드는 자신도 상처투성이라서 미쉘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라 산드라의 포용과는 다른 것이겠다. 그런 의미로 산드라와의 섹스와는 달리 미쉘과의 것은 차디찬 바람이 부는 옥상에서 옷도 채 벗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 때의 차디찬 냉기는 래너드와 미쉘이 응당 견뎌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장면의 색감은 바로 전 래너드가 산드라와 있던 식당의 것과 같다. 미쉘은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고, 다시 래너드는 산드라라는 애인이 있으나 미쉘도 사랑하고 있다.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장소에서의 산드라와의 것은 차디찬 냉기만이 가득한, 자세마저 불편한 미쉘과의 것과 분명히 다르다.
사랑Love이란 게 꼭 이성 간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속에서 래너드와 눈에 띄는 관계는 바로 그의 어머니 루스(이사벨라 로셀리니)의 것이다. 산드라와 미쉘의 서사 아래서 루스는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그저 래너드를 바라볼 뿐이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래너드가 방 안에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를 뿐이고, 미쉘과 함께 떠난다는 래너드를 그저 안아줄 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다. 여느 멜로에서 볼 수 없었던 상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래너드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자신도 엉망진창이라며 미쉘의 상처에 공감함으로써 가능했다. 상처가 있음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말하면서였다.
다시, 래너드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유대인이다. 래너드 역시 유대인이다. 오프닝에서 래너드가 손에 들고 있던 세탁물에 적혀있는 문구처럼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그들의 유대는 더욱 두터울 것이다. 래너드의 부모는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 가족에게 세탁소를 넘겨주려고 했고, 산드라 역시 유대인이다. 산드라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래너드가 산드라와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음으로 사업적인 이득 역시 취하게 된다. 이는 후에 등장하는 파티에서도 언급된다. 거대한 사회 안에서 유대인과 유대인의 또 다른 결합은 앞서 래너드가 벗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상황들에 하나 더해진 셈이다. 유대인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유대인들이 이제 더 이상 팔레스타인에서만 지내는 건 아님을 알지만, 래너드에게서 볼 수 있는 많은 모습들은 그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옥상에서 내려와 각자의 집으로 향한 후, 미쉘은 창문 너머에 있는 래너드에게 자신의 가슴을 내어보인다. 이때의 시점은 분명 래너드의 것이나, 관객의 것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래너드가 자신의 약혼녀와의 것이나 태생적인 아픔들을 미쉘에게 내어보인 것처럼 자신도 속내를 내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래너드는 사진 촬영이 취미였다. 미쉘과 산드라를 모두 찍지만, 미쉘은 카메라에 찍히는 것에 불과했다. 미쉘이 그것을 알고도 허락해줬을 수 있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래너드의 모습은 미쉘을 몰래 찍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래너드의 관음적인 태도는 영화가 거의 끝나는 이 시점에서 미쉘이 먼저 자신의 가슴을 보여줌으로써 끝이 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산드라가 래너드를 안아주고, 래너드가 미쉘을 안아줬던 그 연속성도 끝이났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래너드는 함께 떠나자고 미쉘에게 제안하고 미쉘도 승낙하지만 그 결말을 미리 암시할 수 있다. 래너드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의 이동을 결심하지만, 미쉘은 자신의 가족을 다 버리고 온 애인에게로 향한다.
래너드는 미쉘에게 주려고 산 반지를 바닷가에다가 내던졌다가 이내 다시 그것을 주워든다. 눈물을 보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모여 새해맞이 파티를 하고 있는 산드라에게 그 반지를 끼워준다. 아무런 사실을 모르는 산드라는 기뻐하며, 동시에 울고 있는 래너드에게 이유를 묻지만 그는 “행복해서”라고 말한다. 둘은 키스를 하고 카메라는 점차, 점차 뒤로 빠지며 퇴장한다. 이는 짐 그레이 감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백야>의 주인공은 나젠스까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에겐 이미 미래를 약속한 자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젠스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 역시 주인공에게 화답하지만, 결정적 순간 <투 러버스>의 미쉘처럼 만남을 유지해온 여인에게 향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의 축복을 기원해준다.
“그러나 나젠스까, 내가 모욕당한 것을 언제나 기억하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밝고 아늑한 행복에 검은 구름다리를 드리우리라 생각하는가! 심한 비난의 말을 퍼부어 너의 가슴에 슬픔을 주고, 비밀스런 가책으로 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행복의 순간에도 우울한 생각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가! 네가 그와 함께 제단을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곱슬머리에 꽂은 그 부드러운 꽃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짓뭉개 놓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오, 결코, 결코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다. 너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그리고 감사함으로 가득한 어떤 외로운 가슴에 네가 심어준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대해 축복받기를! 아! 하느님! 더 없는 기쁨의 순간이여!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그것만으로 부족함이 없지 아니한가?”
결국 래너드는 자신을 가족처럼 느끼게 해주는 산드라의 옆에 있지만, 가족이 되고 싶었던 미쉘에게 <백야>의 주인공과는 반대의 생각을 했을 것 같지만, 카메라의 퇴장은 그 복잡한 모든 감정을 다 담으며,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어딘가 모순된 것 같지만, 어딘가 엉기성기 얽혀있는 무엇이 짐 그레이의 영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