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ol, 2015
뉴욕에 위치한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근무하고 있는 테레즈(루니 마라)는 어느 날 손님으로 다가온 여인 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처음 본 순간 매료돼요.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캐롤은 테레즈가 근무하는 매장에, 손님과 직원으로서 짧은 대화가 오갔던 그 테이블에 자신의 장갑을 두고 가요. 우린 이미 둘 사이에 찌릿한 텔레파시 같은 것이 오갔음을 봤죠. 테레즈 역시 그것을 고객센터를 통해 간단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겠으나 굳이 캐롤의 주소를 물어 택배로 보내요. 수줍게 연락처를 묻지 않고도 둘은 서로의 연락책을 얻게 된 셈이죠. 기다렸다는 듯 캐롤은 테레즈에게 연락을 해요. 내일 시간 괜찮냐고, 하지만 테레즈의 대답은 듣지 않아요. 테레즈의 말을 끊고 그냥 나오라는 식으로 말을 하죠. 하지만 테레즈 역시 굳이 답을 하려하진 않아요. 그냥 캐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 됐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인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라는 대사처럼 둘은 서로에게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나는 <캐롤>을 두고 “가장 따뜻한 색, 레드”라 말을 많이 했었는데, 역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때처럼 색에 의한 미쟝센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기도 전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 영화가 개봉했을 16년도에, 미쟝센이란 게 뭔지도 몰랐을 때에도 선명하게 보일만큼 분명하다고 할까요? 당신이 보기에도 그리 어렵진 않으리라 생각해요. <블루>도, <캐롤>도 그 색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설정들을 가져가고 있어요. <캐롤>은 케이트님이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이기도하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크리스마스 시즌이잖아요? 성탄, 산타, 크리스마스 등을 떠올리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붉은색일 거예요. 캐롤과 테레즈의 곁엔 항상 붉은색이 있죠.
캐롤과 테레즈가 처음 마주하는 백화점 씬에서, 테레즈가 셋팅하고 작동시킨 장난감 기차가 보이는데, 이 기차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요. 그리고 후에 캐롤이 매장으로 들어와 그 기차를 보다가 실수로 전원 버튼 같은 것을 건드리게 되는데 그것 역시 붉은색이었어요. 이때 둘의 시선이 겹쳐지게 되고, 그 묘한 무엇인가가 흐르죠. 캐롤은 붉은 색의, 빨갛다기 보다는 다홍색이라고 해야겠죠? 그런 색의 모자와 머플러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두운 색의 가죽 장갑을 벗으니 새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나와요. 이 매니큐어의 색은 우리가 얘기했듯 후반부 그녀의 감정선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요. 이후 만남에서 새빨간 옷에 모자를 쓰고 나타나고, 이때 둘이 간 식당 안의 인테리어가 모두 빨갛다는 것은 제가 괜히 오버해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렇게 떠나는 여행에서 테레즈가 선택한 첫 의상은 빨간 옷이고, 이들은 <블루>에서 아델이 엠마에게서 푸른색을 받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봐도 되겠죠.
하지만 <캐롤>도 <블루>도 그 색이 선명한 순간은 아주 찰나일 뿐이에요. 부윰한 두 색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따라 짙어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하죠. 우리는 캐롤과 테레즈가 백화점에서, 식당에서의 만남 이후 여행을 가기 전에 중요한 장면이 있음을 알고 있어요. 테레즈가 캐롤의 집으로 가 그의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와 딸 린디와의 관계를 목격하게 되고, 후에 캐롤이 테레즈의 집으로 오는, 크게는 이렇게 두 장면으로 말할 수 있겠죠? 근데 이상하죠. 캐롤의 집에 손님으로서 간 테레즈가 차를, 다과를 준비해요. 캐롤이 남편과 다투자 오디오의 볼륨을 키워 둘의 소리를 안 들어주기도 해요. 그건 단순히 둘의 다툼이 듣기 싫다는 것보단 훨씬 큰, 다른 차원의 행동이라 생각해요. 테레즈는 캐롤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어요. 본디 주체적이지 못한 성격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수직적인 관계 때문이기도 하겠죠. 테레즈는 어쭙잖은 위로의 말 대신, 듣지 않음으로써, 알지 않음으로써 캐롤을 위해주는 거겠죠.
하지가 떠나고 캐롤과 둘만 남은 상황에서 테레즈는 피아노를 치며 냉랭한 분위기를 돌려보려 하지만 쉽지 않아요. 캐롤은 가만히 연주를 들어주기보단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요. 그래도 테레즈를 위한 말이긴 하죠. 자신이 찍은 사진들에 대해 영 자신이 없어하고, 자존감도 낮아 보이니 왜 굳이 그걸 걱정하냐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노력하는 것뿐이고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이용하고 나머진 버리“라고. 혼자서는 무얼 먹을지 메뉴도 못 고르던 테레즈에게 그 말이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다시 테레즈는 난리통 속에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몰랐을 텐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해요. 왜일까요? 어떤 감정에 그랬을까요? 말로는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서겠죠. 대화가 통 이뤄지질 않는 자신의 남자친구 리차드(제이크 레이시)와의 관계가 캐롤 부부에게서 보여 이입이 됐을 수도 있고, 청혼을 하는 리차드에게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훗날의 자신의 모습을 봤을 수도 있고, 그저 지금의 캐롤에게 측은지심이 들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케이트님이 우아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결코 손색없는 배우라 생각해요. 그런 그가 연기하는 캐롤이란 캐릭터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여인이에요.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그녀가 앞서 말했듯 의도한 건지 정말 실수인 건진 알 수 없지만 장갑을 두고 간다던가, 본인의 파우치 안에 든 물건도 쉽게 찾을 수 없다던가 하는 모습에서 말이죠. 아마 담배를 피는 것도 단순한 기호식품 정도의 의미보단 불안하고 초조한 자신의 심정을 달래려 할 때 찾는 습관처럼 보여요. 캐롤이 담배를 손에 쥐고 있는 순간들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죠. 캐롤은 모피코트를 포함한 비싼 옷에, 헤어-메이크업을 하는 것과 더불어 테레즈는 쉬이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을 단숨에 결제해버리기도 하지만, 캐롤은 그 재력 말곤 다른 것들이 모두 결핍돼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사실 그것이 영화에서 많이 표현되진 않았지만, 그 결혼생활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캐롤이 테레즈와 여행을 떠난 사이 하지가 캐롤의 친구 에비(사라 폴슨)를 찾아가 캐롤의 행방을 묻는데 이때 에비가 “지난 10년 간 캐롤이 당신 중심으로 돌게 만들었“다고 말하잖아요. 나는 캐롤이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의 불만이 터져 나와 동성애로 이어진 건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테레즈에 대한 캐롤의 마음은 사실 그래요.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란 대사를 볼까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테레즈에게 캐롤의 시선이 머문 것은 왜 때문일까요? 예뻐서? 그 아담한 체구가 평소 자신의 취향이라서? 아니라고 생각해요.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는 따뜻한 분위기의 매장 안에 차가운 인상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닮은 무엇인가를 봤겠죠. 테레즈가 유일무이하게 매장에서 근무하는 씬을 볼까요? 출근하기 전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크게 거슬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것은 아니나 주위 사람들은 각자 누군가를 붙잡고 시시콜콜한 얘길 하고 있어요. 하지만 테레즈는 앞에 누가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죠. 영화에선 무심하게 테이블에 놓여있던 사내규정집을 보지만 원작에선 자신의 침묵을 의식하고 이내 그런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한 행위가 규정집을 보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채 한 장을 넘기지도 못했는데 관리자로 보이는 이가 테레즈를 불러요. 이내 벌떡 일어나 달려가죠. 근무 중에도 그녀는 테레즈에게 쌀쌀맞게 굴어요. 딱히 테레즈의 근무태도가 좋지 않다기 보단 말수도 없고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그녀에게 그냥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보이죠. 나-쁜놈.
둘이 같이 있는 순간을 볼까요? 이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되게 수다스러운 연애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에요. 운전하는 동안 조수석에 앉은 테레즈는 캐롤에게 어떻게든, 동시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곤 해요. 배고프지 않냐며 샌드위치를 건넨다던가, “안심이 돼요? 저랑 있으면? 두려운(scare) 게 있고, 내가 도울 게 있다면 말해줄래요?”라는데, 캐롤은 “난 두렵지 않아요, 테레즈.”라 간단하게 답할 뿐이에요. 모텔이든 호텔이든 숙소에서도 딱히 어떤 대화는 나오지 않죠. 역시 유일한 배드씬(둘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두 번째는 그냥 포옹에서 그치기 때문에)을 봐도 그래요. 캐롤은 가만히 누워있고 그 위에서 캐롤이 리드하죠. 캐롤이 테레즈의 얼굴을 감싸면 그제야 테레즈도 캐롤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 캐롤이 입을 맞추면 그제야 자신도 키스를 하고, 다시, 그 키스란 것도 그래요. 테레즈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곤 캐롤이 말해요. “나의 천사.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이 스윗한 대사가 왠지 모르게 잔인해 보이는 건 괜한 기분 탓일까요.
다시, 이젠 테레즈의 시선으로 봐요. 캐롤의 것보단 조금 더 친절하긴 해요.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도, 주변 인물들과의 일들도 최소 한,두 번은 더 나오니까요. 자꾸만 여행가자고, 결혼하자고 보채는 남자친구와, 사진을 알려주겠다며, 일자리를 소개해줄 수도 있다며 사무실로 불러선 키스를 해대는 이나, 백화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주변엔 대화랄 것을 할 만한 상대가 없어요. 그렇다고 캐롤과는 그게 되냐?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즈가 캐롤에게 빠진 건 차갑게, 무심하게 말하는 듯 하지만 결국 테레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얘기해주기 때문이겠죠. 이건 캐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캐롤과 하지의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라는 애비와의 대화도 일방향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대부분이죠. 심지어는 캐롤이 사랑해 마지않는 딸 린디와의 대화도 그래요. 하지와 애비와의 것은 그들이 캐롤에게, 린디는 캐롤이 딸에게 그러하죠. 다시, 이건 대화라기 보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방식들이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고, 설득시키고, 그냥 말 그대로 통보라던가 말이죠. 하지만 테레즈와의 것도 대화라고 하긴 어려우나 상대방을 고려한 말들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에요.
캐롤이 테레즈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그저 118분의 영화를 다 보고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짐작할 뿐이지만, 테레즈의 것은 비교적 분명해요. 처음 캐롤의 집에 초대받아 가는 차 안에서예요. “눈이 오나 봐요. 난 눈이 좋아요(I love the snow).”라 말하는 캐롤의 얼굴을, 눈을, 입을 차례로 보는데 차가 터널로 진입해요. 이때 캐롤의 눈을 담던 카메라는 숏을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며 입을 띠용 클로즈업해요. 난 이 숏이 왜 이렇게 귀엽죠? 아무튼 그렇게 캐롤이 튼 오디오를 통해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터널 안의 초록 불빛은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죠. 첫키스를 하면 귀에서 뎅- 종소리가 울린다거나 따위의 상황이 바로 이것이겠죠. 누군가에게 갖는 사랑이란 감정이 커지는 것을 이렇게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장면도 또 없다고 생각해요. 초록 불빛이 비치는 차창으로 테레즈와 캐롤의 얼굴이 차례로 비치더니, 눈발이 휘날리는 와중 트리를 고르고 있는 캐롤이 보이고, 몰래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테레즈가 보여요. 그 순간 테레즈가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캐롤은, 그 캐롤에게 갖는 감정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거예요. 아마 내가 아예 모르는 감정일 수도 있겠죠.
원작에서 테레즈의 직업은 무대 디자이너인데 영화에선 사진작가 지망생으로 된 것은 무엇일까요. 심지어 아직 직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단계야. 하이스미스가 실제 자신의 감정을 책으로 썼다고 했는데, 그 때 당시엔 동성애를 정신병처럼 보던 시각이 있었기에 그 어디에서도 당당할 수 없었겠죠. 옆에 앉아있는 사랑하는 이에게도 사랑한다 맘 편하게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겠죠. 아마 그를 사랑하는 감정을 온전히 담아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하지가 건 소송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것일 거고, 딸을 눈송이(snowflake)라 부르는 데도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더욱이 테레즈에게 있어선 캐롤이 첫사랑과도 같은 대상인데 훨씬 어려웠겠죠? 그 작은 사각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그것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온전히 그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설정일 거예요.
다시, 색을 언급하자면, 테레즈의 주변엔 캐롤을 만나기 전부터도 붉은색들이 있었어요. 캐롤이 처음 테레즈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인테리어라던가, 캐롤이 목마르다고 하자 건네는 레인골드(Rheingold)라는 맥주병에도 붉은 라벨이 붙어있죠. 하지만 캐롤과의 이별 이후 벽지를 푸른색으로 칠해요. 자신에게서 캐롤의 색을 완전히 지우려는 시도일까? 아니라고 봐요. 다시, 테레즈는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리고 전혀 자신감도 없던 그녀는 집에 인화를 위한 암실도 있어요. 사진에 대한 자신은 없었으나 열정은 그만큼 컸다는 걸 짐작해 볼 수 있죠. 붉은 조명 아래 짧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여행 간 찍었던 캐롤의 사진을 골라내는데 이 암실의 불그스름한 조명은 아마 그녀가 카메라를 놓지 않는 이상 계속될 거예요. 집의 전체적인 색감은 푸른색이 됐지만, 그 집 한 켠에는 붉은 조명으로 가득 채워진 암실이 있을 거예요. 테레즈의 마음 한 구석에도 캐롤을 향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겠죠.
캐롤과 테레즈의 이별은 말없이 떠난 캐롤이 테레즈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서였어요. 참 잔인하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 침대에서 부둥켜안고 잠을 잤는데 말이죠. 그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란 게 자신이 테레즈를 떠나는 것이라 판단했나 보죠. 테레즈는 편지를 읽고 구토를 해요. 역겨웠겠죠. 시간이 흘러 테레즈는 소원하던 타임즈 사진부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테레즈에게 키스를 했던 그 남자의 소개로 인한 것인지, 테레즈가 사진에 실력이 있어서인지, 혹은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캐롤의 집안 혹은 하지의 집안 인사의 소개로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동시에 역시나 테레즈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해져요. 오늘밤 만날 수 있냐는 캐롤의 편지였죠. 만나선 처음으로 하는 말이 “나올 줄 몰랐어요.” 그리곤 “내가 밉죠?”, “보기에도 정말 근사해요. 갑자기 만개한 꽃처럼. 나와 멀어지면 이렇게 되는 건가요?”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에요. 나라면 보고 싶었노라고, 내가 먼저 널 끊어놓고 이렇게 다시 먼저 연락해 미안하다고, 널 사랑하는 마음이 쉽게 접어지지 않아 너무 힘들어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을 텐데 캐롤은 성격상 또 그렇게 말을 할 순 없어요. 그래서 저렇게 모질게 말을 했겠죠. 하지만 테레즈도 그걸 모르지 않아요. 테레즈도 캐롤을 사랑했었으니까, 아니 지금도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 테레즈는 그 모진 말들에 대한 답 대신 이번에도 또 캐롤의 입장에서 생각해요. “린디는 만났어요?”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래요. 내 마음이, 내 감정이 정말 너무나도 중요하고, 그게 감당할 수도 없을 정도이지만, 상대방의 것을 더 먼저 생각해주는 것. 그거 너무 어려운 거잖아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오고 캐롤은 테레즈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좋은 밤(wonderful night)” 되라고 인사를 하잖아요? 그리고 이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연결되며 둘의 미래를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요.
다시 생각해볼까요? “인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