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ias and Maxime, 2019
그리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나는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며 돌란의 전작들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색감의 과잉이라는 혹자들의 비평이 따르던 그것들과는 분명 다른 영화였다. 스케이트보드에 올라 화면의 틀을 확장시키던, 화려한 색감의 옷들이 흩날리던 장면은 없었다. 세상에 선보인 첫 작품으로써 넘치는 에너지, 기존의 관습을 깨려는 시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입 안에 칼을 차고 금방이라도 서로의 목을 벨 것 같았던 이들의 영화를 가득 매운 설전도 없었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그래서 자칫 평범하거나 감독의 전작들에 미치지 못하는 복제품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나는 그 부분에 이 영화의 미학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었다. 차라리 그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특별했다. 말에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그 특별한 평범함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더 이상 남녀 간의 삼각관계라던가,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설정만으로 특별함이나 신선함을 갖긴 어렵다. 우리는 이미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을 봐왔기 때문인데, <마티아스와 막심> 그리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그 평범하지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영화 곳곳에 잘 배치해두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감정이 잘 전달되도록 해낸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뒤로 되돌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좌우로 흔들리는 청춘의 사랑을 다룸에 있어 그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쌓아 올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감지만 하고 있던 것이 폭발하며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던 잭(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히스 레저)의 감정이 관객의 가슴에 직구로 날아오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이미지들이 포개어졌던가.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에모토 다스쿠)는 같이 일하는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와 연인이 되고, ‘나’와 함께 살던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레 사치코의 마음이 ‘나’에게서 시즈오로 넘어간다. 마티아스(가브리엘 달메이다 프레이타스)와 막심(자비에 돌란)은 기억을 뚜렷하게 하지 못하지만 어렸을 때 어떤 이유로 입맞춤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과의 내기에 져서 단편 영화에 출연해 동성애자 캐릭터를 분하며 키스신을 찍게 되면서 둘 사이에 어떤 마음이 자라난다. 두 영화의 배우들 모두 생동감이 넘친다. 편안한 촬영 현장 덕분이었을지, 배우들 간의 친밀함이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실제로 어떤 마음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 순간 연기가 살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영화에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이 있었으나,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두 영화의 밤에 있었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키스를 하게 되는데, 카메라는 둘의 입이 맞닿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두 얼굴이 가까워질 즈음 숏을 넘겨버린다. 입술이 어떻게 맞닿고 하는지는 돌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상태에 놓이는가, 스스로를 어떤 상태에 둘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 그래서 꺼지는 촛불, 낮에 둘이 함께 정리했던 설거지거리들. 격하게 흔들리고 요동치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마티아스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영을 하러 나선다. 보는 이마저 지칠 만큼 긴 시간을 투자한 이 장면은 고스란히 마티아스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클럽으로 향한다.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흥분하는 장면 역시 긴 시간을 투자했다. 밤새 뛰놀며 귀에선 이명이 들리고 다리엔 힘이 없어 터덜터덜 새벽녘의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떠오를 만한 장면이었는데, 두 장면 모두 너무나 분명하게 각각의 영화의 인물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리며 나아가는, 어쩌면 방황하던 몸과 마음이 안정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누추한 방 안이었다. 막심의 송별 파티를 하던 중 다툼이 있은 후에 향한 방이었다. 다른 이들이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잊고 있던 마당의 빨래를 걷고 있을 때, 마티아스와 막심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표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들었던 낡은 전구가 지지직거리는 소리, 불이 한 번에 켜지지 않아 깜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티아스는, 그리고 막심은 그때까지도 서로를 향한 마음에 반신반의했던 걸까. 그러나 마주하게 됐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아니하고 확신이 된다. 손에 난 상처에, 해서는 안 됐을 말의 대상에 입을 맞춘다. 여태 이렇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투정을 부렸던 것일까. 막심은 대화를 하자고 한다. 마지막 “주말을 같이 보내고 싶어. 우리 얘기하자. 얘기해야 해. 이해하고 싶어.” 그러나 마티아스는 그 말을 다 듣지 아니하고 자리를 떠난다. ‘나’와 시즈오가 사는 방도 그런 기능을 한다. 의도한다면 한 앵글 안에 그 집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간이나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방에 ‘나’가 들어오며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냉장고를 열며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던 방엔 사치코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입가에 토마토 과즙을 묻히고는 “첫인상이 이래서 어쩌나”라고 시즈오에게 첫인사를 건네던 순간이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악기를 함께 불며 놀던 순간이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드는 방바닥에 속옷 차림으로 포개져 있었으나 그 자리엔 없던 시즈오 얘길 하던 ‘나’와 사치코의 장면도 있었다.
의도는 비슷하겠지만 다른 점도 있다. 자비에 돌란은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을 많이 넣었다. 마티아스와 막심이 친구 여동생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입을 맞추는 것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다루는 주요한 사건인데, 이 이후로 둘이 함께 있는 순간이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인물과 보내는 시간마저 놓칠 수 없었다. 둘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여 카메라가 죽어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의 작고 짧은 시선처리마저 아주 집중해서 보아야 했다. 찰나의 암전이라도 있다면, 방금 어떤 장면이 지나갔지? 앞으로 어떤 게 나오려나?라고 쉴 틈 없이 질문해야 했다. 반면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나’와 사치코가 서점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쪽에서 저쪽으로 책더미를 옮기는 장면엔 별 의미가 없었으나 그 딱딱하고 건조한 장소에 활기가 도는 것은 둘이 몰래 나누는 문자에서였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장면 안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면, <마티아스와 막심>은 프레임 안에 새로운 프레임을 설정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선 둘의 사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초반부, 호숫가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마티아스와 막심의 장면이다. 자비에 놀란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에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막심은 고모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마티아스에게만 한다. 과거에도 이미 많은 대화를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마티아스는 손가락으로 사각형 틀을 만들어 막심의 눈앞에 가져다 댄다. 사치코가 지나가며 ‘나’의 팔을 툭 치고 지나감으로써 촉발된 감정처럼 말이다.
다시, 그 프레임은 막심이 스스로 만들 수는 없는 것 같다. 마티아스가 손가락으로 만들어줘야 하고, 친구 여동생이 카메라로 만들어줘야 하고, 친구네 집의 창문이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관객은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의 둘을 보고 있다. 막심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내심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누군가가 형성해준 프레임 안에서만 표출한다. 스스로 만들 수도 없는데 심지어 마티아스가 그곳으로 들어와야만 작동하니 마티아스와 막심은 자꾸만 어긋난다. 이제 곧 떠나야만 하는 막심은 그 작은 틀 안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런 대화도 하지 못하고 이해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오기도 싫다.
돌고 돌아 막심에게도, ‘나’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없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고, 이대로 가버리면 내내 후회가 될 것만 같다. 곧 떠나야 함과, 지는 해는 왜 이렇게 초조한 것인가. 막심은 마티아스를, ‘나’는 사치코를 마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웃고 있는 마티아스도,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의 사치코도 잠시 후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해피엔딩이 될지 알 수 없다. 각각의 인물들의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한 영화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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