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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제작기 9 - 미술, 그리고 촬영 전야

액자가 된 소녀

by 행복한 이민자

- 미술

한 사람의 삶과 꿈이 속절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무너지는 이야기다. 그 몰락 앞에 어떤 저항이 의미 있을 수 있는가. 과장된 판타지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일상적인 가운데 환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1. 액자

무생물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변신의 결과인만큼 현실에선 좀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질감이기를 바랐다. 판매하는 기성품 같은 느낌이 나면 안 됐다. 제작에는 소품의 강상철 선배가 고생해주었다. 1년차 때 같이 했던 황인혁 선배의 단막 <쌈닭 미숙이>와 나의 공동연출작 <천상여자>의 소품이 상철 선배였다. 액자 위의 도안은 세트 디자이너 전여경 씨의 작품이다. 전여경 감독은 같이 하기로 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원래의 데뷔작도 같이 하기로 했던 미술감독이다. 전우성 선배의 단막 <아내가 사라졌다>와 수목드라마 <천명>을 같이 했던 인연이다. 몇 번의 수정을 통해 액자가 완성되고 정인선 씨의 사진이 들어가자, 됐다, 이제 찍을 수 있다! 는 자신감이 생겼다.

2. 로케이션 - 재개발 지역

인천의 두 군데 지역을 섞어 찍었다. 김혜림 섭외부장님, 이기우 섭외부장님과 함께 했다. 가장 걱정했던 것이 로케이션의 질감이었는데 어렵사리 촬영 허가를 받았다. 상림과 세영이 같이 들어가 사진을 줍던 집, 상림 사진관, 성택 집을 비롯하여 로케가 하나 하나 완성되어 갈 때마다 이 세계가 완성되어가는 기분이었다.

3. 대본 표지

단막극의 경우 따로 포스터가 제작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제작진과 배우들이 공유할만한 사전 이미지가 없는 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대본 표지가 그 역할을 하길 바랐다. 전여경 디자이너는 몇 가지 안을 만들어 제시해 주었다. 사실 대본 표지가 디자이너의 일은 아니지만, 작업을 시작할 때 모두 공유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여경 씨가 만들어준 대본 표지는 지금 포털에서 <액자가 된 소녀>의 메인 이미지가 되었다.

- 첫 촬영

1. 전 날 밤

확신과 불안이 교차하는 밤. 첫 촬영 전 날 밤. 사무실에 앉아 두 가지 감정의 교차로 가슴을 가득 데우고 있을 때 조연출 이현석PD가 들어왔다. 1년차인데 비해 안정감 있게 티내지 않고 일하는 타입이었다. 나는 조연출을 '하소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년 차가 듣기에는 좀 많은 온갖 가지 걱정과 불안을 차분하게 들어 넘겨 온 차였다. 현석인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결정해 온 것들에 대해 후회는 없냐고. 특히 선생님에 대해서도. 후회는 없어. 잘 하실 거다. 그럼 걱정 말고 내일 자신 있게 찍으세요! 흠... 누가 드라마PD아니랄까봐 문답식 격려를...

진행팀은 오세규 씨와 이수진 씨였다. 내가 아끼는 연출부 동생들, 세규와 수진이. 의례 스케줄이나 소품 및 준비사항 확인을 하러 들어왔거니 했는데 그 둘의 손에는 스케줄표 대신 감독 의자가 들려 있었다. 오 선생님 것까지 해서 두 개나. 데뷔작 기념 선물이었다. 예전에 <온에어>라는 드라마에 고 박용하 씨가 데뷔하는 데 작가 역이었던 송윤아 씨가 감독 의자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 그대로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었다. 연출부가 데뷔작 연출 의자를 선물해주는 경우는 처음 들었다. 두 친구들의 배려다. 그 둘은 오 선생님의 상태를 잘 알고 배려와 예의, 그리고 사려깊음으로 상황을 운영해 주었다.

가만히 지난 8년을 돌이켜 보았다. 드라마PD가 되는 것이 인생의 돌파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돌파해 어디로 온 것일까. 그리고 내일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