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가 된 소녀
- 새로운 성택과 촬영장으로.
1. 최종원 선생님
그 날 저녁, 최종원 선생님이 방송국으로 들어오셨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다만 남아 있는 시간이 달랐다. 촬영까지 한 번의 낮과 두 번의 밤이 남아 있을 뿐. 선생님의 질문은 역시, 그래서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냐, 로부터 시작되었다. 숨바꼭질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흥미로워 하시기도, 곤혹스러워 하시기도 했다. 인선이와 재균이가 잇달아 들어왔고, 다시금 간이 리딩과 의상 피팅을 진행했다.
이런 경우 대개 연기자는 눈치를 챈다. 나 전에 누군가가 있었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성택에 집중하셨다. 오 선생님과는 또 전혀 다른 한국의 환경에서 오랜 시간 연기를 계속해 오신 안정감이 묻어났다. 선생님도 나도, 성택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좁혀 나가야 했다. 성택에게 세영이란 어떤 존재인가, 성택은 액자를 순간순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성택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지금은 어떤 입장인가 등등을 토의하기 시작했고, 각각의 입장에 대해 배우와 연출 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결국 촬영일이 삼 일이 다 지나도록, 어쩌면 마지막까지, 인물과 감정선에 대한 의견 차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의견 차이를 두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최 선생님의 적극성과 열린 태도 덕이다. 연출자로서는 오래 생각해왔던 연기자가 아닌 다른 연기자를 급히 주인공으로 모신 후, 새롭게 몰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최종원 선생님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계속 고개를 갸웃하는 데뷔작을 찍는 젊은 연출자. 당신 전에 누군가가 있었으리라 예상되는 상황.
젊은 연출자와 나이 많은 배우는 서로 어렵다. 연출자는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노 배우에게 어떤 식으로든 지시를 주는 입장이기에 혹 예의에 어긋날까 조심스럽다. 노 배우의 긴 경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연출이 어설프게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배우 입장에서도 나이와 경력에 대한 예우랍시고 연출이 솔직하게 반응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될 것이다. 현장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으로 어린 동료들과 같이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을까에 대한 조심스러움도 있을 것이다. 그걸 뛰어넘는 일이 서로의 숙제였고, 연출과 배우는 그 숙제에 골몰했다.
2. 다시 촬영장으로.
그렇게 2차 촬영부터는 스케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결정을 내린 것은 나 자신이었으니 감상에 빠질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연출 행위에 있어 동일하다. 작품을 위한 판단에는 빛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를 없앨 수 없다면 빛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주인공 배우의 교체는 드라마의 질감을 크게 바꾼다. 인물에 대해 거의 반 다큐적으로 접근했었기에 더욱 나 자신의 관점을 깨끗히 하는 일이 중요했다. 오순택 선생님이 아닌 <액자가 된 소녀> 속의 성택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우리의 새로운 성택은 세영에게, 상림에게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최 선생님과 나의 의견은 약간 달랐고, 각각의 의견이 중재된 만큼이 화면에 담겼다. 긴장감 속에 새로운 성택은 구축되어 나갔다. 마치 일어로 번역된 영어 원전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2차 번역만의 결이 작품에 남았다.
촬영 감독은 엄준성 선배다. 당신은 기억도 못 하시는 "자기 입봉작은 내가 찍어 줄게"라는 대사를 나 1년차 때 날리신, BS(바스트 숏)을 유난히 잘 찍는 촬영 감독 선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900R의 시대를 열어젖힌 선배. 이번에 쓴 카메라는 레드 에픽이다.
조명 감독은 임강순 감독님이었다. 대하 드라마를 같이 하면서 심적으로 많이 의지가 되었던 어른이시다. 동시 녹음 기사는 <미래의 선택>을 같이 했던 양준호 기사가, 보조출연 반장은 역시 <미래의 선택>의 이종민 반장님이, 장비는 주재호 팀장이 맡았다.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그 때 그 때는 무척 심각하지만 지나고 나면 해결되었다는 기억만 남고 쉽게 잊게 된다. 의상을 두고 최 선생님과 벌인 옥신각신, 무쇠 체력을 자랑하시다 새벽 비 씬에 컨디션이 급락하셔서 깜짝 놀랐던 일, 재균이의 스케줄과 화재 씬의 세트 상황이 맞물려 낮밤을 바꿔 찍었던 일,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폐허 촬영, 스케줄로 인한 배우와의 갈등 등, 곡예 하듯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선 그냥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격려차 현장을 찾아준 선배들과 스탭들, 배우들, 야식 차를 보내준 후배들 등 주변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였다. 동기 끼리 3주나 연달아 데뷔하느라 챙길 사람이 3배라 모두들 바빴을텐데 감사한 일이다. 동기 셋이 나란히 데뷔하는 일은 드라마국에서 그 간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바로 직접 비교가 되는 부담도 클 뿐더러, 스케줄을 맞춘 듯 나란히 데뷔시키는 것도 우연이 잘 맞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퍼즐>의 김정현PD와 <원혼>의 이재훈PD. 각자 색이 전혀 다른 세 사람의 데뷔는 나름 우리 방의 소소한 이벤트이지 않았을까.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은 결국 결과물로 남는다. DVD 코멘터리처럼 영상을 틀어놓고 작가, 배우와 같이 모여 수다를 떨지 않는 이상, 어떻게 쓸 바를 모르겠다. 직접 연출을 하지 않을 때는 상황에 따른 나름의 감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연출을 하는 이상 현장에선 머리 속에 늘 최종 완성본을 그리고 있기에, 결과물 외에 글로 남길 것이 별로 없다. 하루하루 지나며 이 이야기에 서서히 스며드는 배우들과 스탭들을 보며 작품이 가질 최종 전달력을 가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