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에세이적, 쓰기. 삶을 되새기는 방법으로써
롤랑 바르트를 읽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처음 읽었을 때,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언제가 지금이 되었는데,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일기 같은 이 글들이 어려운 이유는 철학 담론의 지도 위에 쓰여진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밝은 방>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진과 보는 사람의 관계를 다차원적으로 설정한다. 대상이 있고,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대상을 보고, 역으로 사진이 독자를 보기까지, 이런 설명의 연쇄를 따라가다보면 문득 김연수의 소설들이 생각 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김연수는 인생을 두 번 산다는 표현을 했다. 살면서 한 번, 되짚으며 한 번. 그런데 최신작인 <일곱 해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인생을 세 번 산다는 논지를 펼친다. 되짚은 후 정방향 복기의 삶의 에너지가 이어진다는 느낌으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서 라깡의 정신 분석, 바르트의 사진론, 김연수의 소설들이 모두 삶의 어떤 진실을 자기만의 방식과 언어로 포착한 듯한 느낌이 든다.
결국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포착하고 경험하며 해석해 나간다. 지금껏 어떤 느낌만으로 삶을 해석해나가왔지만, 이젠 너무나 많은 것이 망각의 늪으로 흘러들어가고 자꾸만 생각의 단계를 생략하려 든다. 이럴 때 다시 만난 바르트는 아마추어적 입장에서의 접근을 찬양한다.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자신처럼.
무엇을 할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이 이 나라 공동체를 발전시켜왔고 지금은 고사시키고 있다. 에세이도 마찬가지. 쓸 거면 소재가 섹시하고 주제가 확실하며 웃기면 좋고 구독자가 늘면 보람 있고 원고료라도 받으면 성취감 있고 급기야 책으로라도 나온다면 성공한 것, 이라는 식의 성공 방정식을 탈 게 아니면 굳이? 귀찮게? 그러나 삶을 포착하고 되새기고 다시 사는 형태의 기쁨을, 지나치게 자본주의적 경쟁 체계로 포착하는 습관에 절어서 제대로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목적성이 분명한 글들. 칭찬 받아야 하고, 점수를 잘 받아야 하고, 입사를 해야 하고, 팔아야 하고...... 사실 글은 자신의 삶을 다시 사는 한 형태일 뿐인데.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일기장이 아닌 브런치에 적고 있다. 타인에게 가닿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는 나를 위한 글에도 색다른 긴장감을 부여한다. 타자화된 나와 함께 글을 쓰는 기분이랄까. 나를 위한 글이라도 공유 가능성이 주는 긴장과 행복 또한 중요하다. 인간은 같이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에세이의 형태가 글일 필요도 없다. 어떤 방식의 사진, 영상, 음성, 음악, 그 모든 것이 에세이 로그의 한 형태이다. 시청각 데이터의 채집이 스마트폰으로 일원화된 사회에서는 시청각과 언어를 통합한 에세이 기록으로 삶을 되새기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졌다. 그러나 이는 오해려 불행감을 늘리는 듯 하다. 선택받을 만한 섹시한 게시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 타인과의 비교, 그리고 게시물로부터 오히려 소외받게 되는 실제의 존재, 도파민의 공격에 이르기까지, SNS가 가져다준 다양한 에세이 기록의 가능성은 다시금 사람을 소외로 밀어 넣는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미디어를 만들고, 미디어는 사람을 소외시키고, 사람은 또 다시 미디어를 발전시키고, 의 연속.
그래서 허덕이는 방식으로 미디어의 요구를 따라가는 에세이 쓰기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방식의 자기 지향적 에세이 쓰기를 시도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시청각을 포함한 것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 격려를 롤랑 바르트로부터 받는 것 같다. 시선의 노예에서 벗어나, 내가 나를 성실히 읽어주기를, 그러다 보면 또 생겨날 많은 상호 독해의 가능성들을 설레게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