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Fiction)
소년은 날 때부터 귀가 없었다. 단지 귀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듣지를 못했다. 소년은 미학자의 서재에서 자랐다. 미학자는 소년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소년은 그림을 그렸다. 문자를 배웠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영상도 만들었다. 소년은 미학자의 안내를 받아 시각 예술의 모든 분야를 탐닉하고 연마하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는 세련되고 근사한 청소년이 되었다. 귀가 없다는 사실은, 세계를 미학자와 시각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해온 그에게 별다른 결핍이 되지 못했다. 시각 매체에 대한 표현력을 기르는 데에만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머리를 근사하게 길러 귀가 있을 자릴 가리고, 남자답게 변해가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미학자의 이메일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처럼 여겼던 미학자는 시각 예술에 대한 소년의 반응과 성장에 대해 세세한 로그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로그를 다른 미학자와 나누고 있었다. 이 미학자에게 소년은 시각 예술에 대해 가장 순수한 인간이었다. 청각이라는 조건이 애초에 제거되어 미학자가 제시한 조건들에 맞춰 성장해 온. 내가 받은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니. 나는 실험체였을 뿐이었다니. 소년은 절망했다. 소년은 불길한 예감에 이메일을 뒤졌다. 혹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 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 증거는 찾지 못했다. 다만 미학자는 단 한 명의 다른 미학자와 자신의 실험과 발견을 나누고 있었다. 둘은 연인이었다. 실험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와 함께 사랑의 밀어를 주고 받고 있었다. 방금 사랑을 상실한 소년은 더욱 분노했다. 자신을 매개로 이 둘은 지적, 관계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상대방 학자에게도 실험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 또한 자신의 연구를 이쪽에 보고하고 있었다. 상대 미학자는 눈이 없는 소녀를 양육하고 있었다.
눈이 없는 소녀의 양육기는 귀가 없는 소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소녀는 음악을 듣고 연주했다.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청각예술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성장을 기록하는데 최적의 실험체였다. 소년은 방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뛰어넘는 연민과 사랑에 사로잡혔다. 저 소녀야 말로 나의 운명일 것이다. 청각이 결핍된 나와 시각이 결핍된 너가 만나면 그제서야 우리는 이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고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읽은 마지막 이메일에는 그 소녀와 미학자가 다음 주에 이 서재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두 실험체가 만나 서로 어떤 반응을 하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에겐 그 실험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영혼의 반쪽일 소녀를 상상했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다림질하고, 머리도 다듬었다. 비록 소녀가 보지는 못할 지라도,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드디어 소녀가 오기로 한 날, 소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미학자는 소년이 이메일을 엿봤으리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소년의 흥분이 다만 새로운 사람의 방문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만 여겼다. 눈이 없는 소녀는 널따란 서재 안으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와도 같은 미학자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청아하며 정중한 목소리로 두 미학자에게 청했다. ‘잠시 저 소년과 둘이 같이 있게 해주시겠어요?’
소녀의 목소리에 압도된 듯 두 미학자는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소년은 안타깝게도 소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정은 소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소년의 매력을 소녀는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인간의 소리가 아닌 듯한, 얇다가도 굵어지는 이상한 신음 소리 같은 것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음성과 언어로 사람과 소통해온 소녀에게 소년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인간이기는 한 것일까. 그리고 이는 소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다른 사람이 대충 꾸며준 티가 역력한 어색하기 그지 없는 외양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 안경을 벗으면 눈이 없단 말인가. 자신의 머리카락 아래에 귀가 없다는 사실도 순간 잊은 채 소년은 생각했다. 그 둘은 간절히 서로를 기다려왔지만, 가장 서로를 읽어줄 수 없는 상대였다. 둘에게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 후로부터 둘은 정기적으로 만났다. 미학자들은 매번 자리를 비켜주었다. 둘 사이에는 음성을 텍스트로,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꿔줄 수 있는 컴퓨터가 놓여졌다. 소년의 인지는 사진적이었고 소녀의 인지는 시간적이었다. 둘은 가장 서로를 이해해줄 수 없는 상대에게 자신을 이해시켜야 하는 목표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눈으로 포착되는 이 이미지를 저 소녀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음성과 음악의, 리듬과 고저에 대해 저 소년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시작은 실망이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시각적으로 실망했고 소녀는 소년에게 청각적으로 실망했다. 그러나 그 실망은 점점 호기심으로 자라났다. 소년의 보호자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저 입에서는 어떤 목소리와 내용이 나오는 것인가. 소녀의 보호자는 소녀의 귀에 소년이 얼마나 수려하고 섬세한 외양과 동작을 갖고 있는지를 속삭여주었다. 소년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이상한 소리와는 다르게. 둘은 이제 호기심을 넘어, 자신이 갖지 못한 감각에 대한 강렬한 결핍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핍은 상대방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 되었다. 서로 가장 읽어줄 수 없는 상대이기에 가장 절박한 노력이 필요했고, 그 노력은 그만큼의 마음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서로를 끊임없이 읽고 듣기를 거듭했던 어느 날, 소년은 미학자의 서재에서 한 번도 궁금해 해본 적이 없던 LP를 꺼내 들고 왔다. 요한 스트라우스. 소녀가 도착하고 소년은 음악을 틀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컴퓨터를 통해 텍스트에서 음성을 전달했다. ‘나는 춤을, 그림으로만 접해보았어.’ 소녀는 음성을 텍스트로 전달했다. ‘나는 춤을 리듬으로 느끼지만, 넘어질까 두려워’. 소년은 왼손으로 소녀의 오른손을 잡고 팔을 뻗었다. 그리고 오른팔로 소녀의 몸을 안았다. 둘은 서로의 심장을 맞대고 호흡을 일치시켰다. 소녀가 호흡을 리드하여 왈츠 박자의 리듬에 소년의 리듬을 맞춰주었다. 소년은 자신의 발로 소녀의 발을 옮겨주었다. 비틀비틀 둘은 절박하게 몸을 맞댄 채 삼박자 왈츠의 리듬에 몸을 싣기 시작했다. 소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이건 좀 불공평한 것 같아.’ 컴퓨터에서 멀어진 소년은 이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소녀의 심장 박동과 맞잡은 손에서 전달되는 리듬만을 느낄 뿐이었다. 소녀는 보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소년을 따라 스탭을 내려놓았다.
두 미학자는 서재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함께 할 수 있는 형식을 찾아낸 소년과 소녀의 절실한 춤을 보며 둘은 감동받았다. 그리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서로 확인했다. ‘카메라는? 4대가 다 잘 돌아가고 있지?’. ‘마이크는? 호흡까지 잘 들어오고 있지?’.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저 소년과 소녀만큼 서로에게 절실할 수 있던 때를 그만 지나쳐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갑자기 카메라와 마이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둘은 잠시 침묵했다. 저 춤을 보기 위해서라면, 저 춤을 듣기 위해서라면, 저 춤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 정말 그런 것일까. 둘은 같이 만들 영화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 영화가 지금 저 춤을 최초로 직접 목격하고 있는 자신들의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