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다는 감각
얼마 전 재미로 하는 인터넷의 성격 검사 같은 것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성실성 항목에서 상당히 낮은 점수를 받았다. 충격이었다. 비교적 지금껏 성실하게 노력해왔기에 그나마 지금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검사의 진단 항목에 따르면 나는 계획성이 매우 낮고, 자제력이 형편 없으며, 신중함도 꽤 결여된 인간이므로 성취를 위해 장기적으로 노력하는 미덕인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그간 가져왔던 자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진단에 난 얼른 변명거리를 찾았다. 설문에 있어 내가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한 답변을 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는 '그럼 내가 스스로 성실하다고 생각해왔던 건 무엇 때문이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어쨌든 계획성도 별로고, 자제력도 별로고, 신중함도 애매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난 스스로 성실하다고 착각해왔던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완전 연소'에 대한 감각과 성실을 착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혹은 체력적으로 탈진하면 나는 스스로 최선을 다했고 성실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해 왔다. 이렇게 지칠 때까지, 잠도 들지 못하고 고민하고 노력했으니 나는 성실한 사람이야. 과연 그랬을까? 몸의 고통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관리 부실의 결과일 뿐이며, 정신적 탈진 역시 마감에 대한 불안에 탐닉하면 쉽게 도달하는 지경일 뿐이다. 신체와 정신의 주관적 고통을 두고 난 이것이 성실의 근거일 것이라는 어리석은 감각적 확신을 지녀왔던 것이다. 그리고나선 얼른 피로에 대한 보상과 위안을 찾아 헤맸다.
그럼 성실이 아닌 무엇이 내게 있었을까. 성실 비슷한 것은 있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현재를 너무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을 목표 의식과, 여하튼간에 어설프게라도 반복된 노력과, 산만할 때 곁눈질한 것들로 살짝 넓혀진 시야와 나름의 균형감각 같은 것들. 삶은 단일 규칙 아래 경주 같은 것이 아니기에, 단일 기준 아래 성실 척도에서 내 삶이 어떻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그냥 살아온 것이지.
그런데 난 그 부족한대로의 성실이라도 자랑스러워할까? 물론 자랑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노력과 성실의 순간에도 이게 거대한 기만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목표는 의미가 있는 목표인지, 내 노력은 정확한 지점을 자극하며 축적되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의심하다보면 허무와 권태가 쉽게 찾아온다. 그래서 대한민국 위인 김연아 씨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명언을 남겼으리라.
다만 충실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주는 충만한 행복감은 내게 중요하다. 결국은 그 감각을 좇으려 이것 저것을 모색해온 삶이다. 어찌보면 지루하게 느껴지는 성실과는 가장 상반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소진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자기만족에 이르는 비뚤어진 성실 감각도 충만에 대한 지향 때문이다. 피로가 충만하게 존재를 압도하면 그것이 극한의 성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맙소사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충만한 존재의 순간이 인생의 점이라면 성실은 그 점들이 자주, 더 고양된 형태로 나타나게끔 하는, 점들을 잇는 선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선이 곡선일수도 있고 직선일 수도 있다. 그 선의 기울기가 가파를수도 있고 완만할 수도 있다. 또는 내리막일 수도 있다. 별처럼 우연히 인생에 나타나는 충만의 순간을 나의 의지로 조각해내면서 더 고양된 형태를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선 잇기 놀이가 성실 아닐까. 별빛에 눈이 멀기 전에 성좌를 그려 별자리를 상상하게끔 하는 동력으로서의 성실. 개별 별빛이 아름답다는 감각만으로는 우린 별자리도, 그에 얽힌 이야기도 상상할 수 없을테니.
별과 별 사이의 선을 잇는 일이 아니라 별을 눈이 아프게 바라봤다는 것으로 성실하다는 감각을 채우려고 했다니, 나의 성실 감각 체계에 통째로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살짝 알고 있지 않았나. 나의 성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연필을 깎고 선을 잇는 하루의 일과를 통해 충만의 순간을 잠시 엿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