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가 된 소녀
- 방송, 그리고......
1. 방송 당일
회사 PD협회보에서 동기 3명의 데뷔를 취재하면서 물은 마지막 질문이 데뷔작 방송 시점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으냐 였다. 셋 다 집에서 맥주 한 잔과 TV를 보겠다고 답했다. 워낙 늦게 방송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누군가와 떠들면서 볼 정신이 없었다. 가만히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일찍 테입을 주조에 넘기고 좋아하는 캔맥주를 사들고 와 냉장고에 넣어 놓곤 거의 여섯 시간 이상을 가만히 방송만 기다린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장면과 소리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2. TV단막극
만드는 사람이 느끼는 가치에 비해, TV단막극은 시장성이 TV드라마 장르 중에서 제일 낮은 편이다. 다음 회를 보게 만드는 것이 TV프로그램의 기본 전략인데, 그게 아예 성립 자체를 하지 않는다. 단막극으로 편성 띠를 만들어도 늘 달라지는 이야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낮아 띠에 대한 충성도도 떨어진다. 더욱이 부정기 편성이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다 얻어걸리는 걸 기대할 판이다. 예산이 적으니 스타 캐스팅이나 시간과 품이 들어가는 고급스런 촬영도 어렵다.
그래서 단막극의 존재 이유는 주로 '신인의 등용문'이 되고는 한다. 신인 연출, 신인 작가, 신인 배우가 의기 투합할 수 있는 장르로써의 공영성이 단막극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긴 하나, 이는 단막을 그 자체의 완결성과 재미가 아닌, 사회적 의미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단막은 단막 자체로서보다 미니시리즈의 진입로나 영화보다는 가볍고 짧은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단막극 잘 해 봤자 참여한 사람들의 자기 증명 정도의 의미가 있으며 결과물은 결국 단막보다 훨씬 공을 들이는 미니시리즈나 영화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개념. 메이저 영상물과 비교되는 마이너 장르로서의 단막극. 이런 이미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막은 단막 자체로 그 의미를 획득해야지, 미니나 영화의 맥락에서 마이너 장르로써 존재할수록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 누가 사회적 의미를 고려하면서 단막극을 보는가. 단막극을 볼 이유가 있어야 단막극을 본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단막에서만 줄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다. 그러려면 미니나 영화가 아닌 단막극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것이 무엇일까.
연속물이나 영화는 상업적 고려 때문에 소재나 주제, 장르를 가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단막극의 경우는 그렇게 기피된 소재와 주제, 장르에 천착할수록 오히려 시장성이 생긴다. TV단막극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이 있어야 시청자가 굳이 단막극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대중이 향유하는 픽션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살찌우는 일이다. 단막극이 업계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마이너 리그가 아니라, 단막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개별 리그인 것이다.
8일의 촬영 기간을 가지면서 드라마국에서 보낸 지난 8년을 돌이켜 보니, 마치 촬영일 하루를 얻기 위해 1년을 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계속 자기 작품을 할 기회를 가질 것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생각이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하루를 얻기 위해 1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에 더욱 단막 답고 싶었다. 그래서 <액자가 된 소녀>에 TV드라마 연출자로서 내가 생각한 '단막다움'을 녹이려 노력했다. 아마 이런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단막극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유튜브
TV는 만든 사람이 감정적으로 절정감을 느끼는 시점이 애매하다. 영화의 시사회나 연극처럼 그 순간 관객의 반응을 지켜볼 수가 없다. 연출자로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시점이 없다는 것은 좀 지치는 일이다. 결국 피드백은 방송 이후 인터넷에 남은 흔적이 대부분이라, 한동안은 하릴없이 그 흔적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모호함이 효과적으로 가닿은 사람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성의 있게 리뷰를 작성해준 많은 블로거들께 감사하다. 내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성의 있는 피드백이었다. 또한 흥미로웠던 건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방송 후 2주일인가 지나서 월드 채널에서 <액자가 된 소녀> 자막판을 유튜브에 업로드했고 그 밑으로 사람들의 드라마 해석이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다. 혼란을 느끼는 사람, 날카롭게 분석하는 사람, 직관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사람 등등 여러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하고자 했던 바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4. 데뷔작의 끝.
궁극적으로 데뷔작을 통해 내가 그렸던 나 자신의 서사는 이루지 못했다. 존경하는 스승의 제자로써, 그 스승과 했던 오랜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오순택 선생님을 한국의 시청자에게 널리 선보이며 의미 깊은 은퇴작을 만들어 드리면서 나의 연출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지금 한국 사회를 가장 아프게 한 사건에 대한 고민에서 만들어진 서사와 형식이라면 단막극으로써의 존재 의의가 빛나리라 생각했다.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내 기대는 지나치게 아마추어적이었을까. 방송을 내고 한 동안 내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낳았고 또 무엇이 돌아왔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돌이켜 생각하니 <액자가 된 소녀>는 나의 데뷔작이라기보다는 뒤늦게 찾아온 졸업 작품 같았다. 내가 고민해온 것들과 살아온 흔적을 여기에 새겨놓고 싶었던 것 같다. 큰 욕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처음 이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올랐을 때가 생각난다. 크나큰 상실을 대한 사람들과 그 상실을 지켜보며 공동체의 몰락을 예감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미래의 작은 열쇠라도 심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았다면, 그 마음이 전달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이 이야기는 그 맡은 바 일을 해낸 것이다. 유리병에 담겨 바다에 던져진 편지처럼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역할을 또 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