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KBS 드라마 스페셜 <머리 심는 날>
2015년 3월 27일 22:00 방송, 70분 물(실 러닝 타임 61분 30초)
- 기획, 대본
1. 탈모와 스포츠
<어바웃 어 보이>의 소설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닉 혼비는 축구광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난 작가와 스포츠광의 이미지를 연결시키지 못했다. 극작의 영역과 스포츠의 영역은 전혀 다른 것 같았으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난 스포츠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스포츠와 픽션은 서로 대체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작가가 왜 그런 데 시간을 쓰지? 글 쓰는데 별로 도움도 안 될 듯, 이라고 생각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열광적인 NBA(미 프로농구)의 팬이 되어 있었다. 재밌다는 경기 뒤늦게 한 두 경기 챙겨보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제서야 스포츠의 특정 리그를 챙겨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재밌는지 알게 된 거다. 나는 경기를 챙겨보고 스탯을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 온갖 NBA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각종 게시판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 게시판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스포츠 스타의 플레이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올라오는 애틋한 종류의 글이 있었으니, 바로 탈모 스타에 대한 애잔함이었다. 거의 인터넷 스포츠 까페 게시물 중 하나의 장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판타지스타, 마누 지노빌리는 단골로 소환되는 선수다. 10년 전만 해도 풍성한 머리숱을 야생마처럼 휘날리며 왼손 덩크를 꽂던 미남 스타 지노빌리는 급격한 정수리 탈모와 M자 탈모를 동시에 겪게 된다. 부감으로 찍은 중계 화면으로 매년 더욱 지름을 넓혀가는 그의 희디 흰 정수리를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 팬들은 그의 눈부신 패스와 화려한 돌파에 탄복함과 동시에 탈모로 인해 급격히 빛을 바래가는 그의 외모를 안타까워 했다. 탈모를 화제에 올리는 동안은 판타지스타도 범부에 불과했다.
지노빌리가 탈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의연하게 대처하는 반면, 현 NBA최고 선수라 불리는 르브론 제임스는 M자 탈모를 가리기 위해 점점 더 두꺼운 헤드밴드를 착용하는 경우다. 헤드밴드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착용 위치가 점점 더 이마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전 세계에서 가장 농구를 잘한다는 선수도 탈모에는 속절 없이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뭇 남자들은 놀려먹다가 안타까워하다가 애틋해 했다. 머리카락을 제물로 바치고 실력을 얻었다는 싱거운 소리를 해대며 게시판 이용자들은 옹기종기 키득키득 놀았다. 아아, 이처럼 난 뒤늦게 스포츠에 빠져들면서 나도 모르게 매일 탈모 관련 화제를 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 원래의 계획
처음부터 탈모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원래 나는 데뷔작으로 뮤지컬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과 투자 상의 난항이 예상되어 데스크는 일반적인 단막으로 먼저 데뷔하길 권했고, 그렇게 준비한 것이 <액자가 된 소녀>다. 그런데 <액소>를 하고 나니 더욱 뮤지컬 드라마를 하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원 제작비를 맞추는 저예산 뮤지컬을 하자니 대중적이지 못하고 만듦새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데스크가 반대했다. 고예산으로 가려면 투자가 필요한데 진행 중이었던 예산 유치도 중간에 떠버린 상황이었다. 단막극을 폐지하네 마네 싱숭생숭한 분위기 때문에 단막도 소위 ‘대중적인’ 작품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연출 혼자서 돌파할만한 상황이 여전히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장르와 실험, 신선한 소재가 단막의 재미이자 ‘대중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검증된 재미’를 요구한다면 익숙한 장르와 스토리로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액소>는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방송되었고, 그 시점에 방송되는 드라마로서의 재미와 존재감을 획득하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2015년 단막은 방송시간을 금요일 9시 반으로 당겼고 40분씩 2부작으로 형태도 변화시킨다고 했다. (금요드라마 <스파이>가 그 같은 형태로 40분 2부씩 8주간 방송했다.) 황금 시간대의 승부니 드라마국 안팎으로 검증된 재미를 요구할 만 한 상황이었다. 일요일 밤 자정과 금요일 밤 아홉시 반. 타깃 시청층과 방송 시간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야 했다.
<액자가 된 소녀>를 끝낸 후 난 <2014 KBS 연기대상>으로 배정되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 방송할 단막을 40분 2부작 포맷으로 준비하면 된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렇다. 이 글을 쓰는 바로 지금 이 시점이다. 계획은 그랬다.
8월(2015 드라마스페셜 시즌2)에 방송할 것 같으나, 4월(2015 드라마스페셜 시즌1)에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 준비는 해두라는 말도 있었다. 단막극을 지속시킬 것인지, 지속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드라마국 안팎으로 말이 많았는데 그 시점까지 제대로 결정이 안 된 탓이었다. 당시로서 시즌1 라인업은 다 찬 듯 보였고, 나는 시즌2를 위한 예비 연출 인력이었다.(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사람들은 뮤지컬 기획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다른 걸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3. 코미디! 블랙 코미디!
코미디야 말로 연출자의 재능과 사려깊음이 가장 필요한 장르라고 생각해왔다. 웃겼느냐 못 웃겼느냐. 코미디 성패의 기준은 선명하고 냉정하다. 개그 콘서트나 SNL KOREA에서 선 보이는 종류의 코미디도 어렵지만, 극화된 코미디는 다른 방식으로 어렵다. 코미디 쇼에서는 안 웃기는 상황이 생기면 다음에 웃기면 된다. 방금 던진 수류탄이 불발탄이면 얼른 새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극에서는 뭘 던지건 간에 나름의 이유를 갖고 축적되어야 한다. 불발탄도 드라마의 역사가 되는 거다. 물론 코미디 쇼도 설정과 반전의 구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축적이 필요하고, 극화된 코미디 장르도 단발성 슬랩스틱을 종종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많이 터뜨리는 것’과 ‘터뜨리면서 의미를 구성해 가는 것’ 사이에는 확실히 결이 다른 어려움이 있다. 뭐가 웃긴지, 어떻게 웃길지를 감각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어려움을 한결 수월하게 돌파할 것이다. 우디 앨런처럼? 재능이다. 또 코미디는 웃기면서도 그 웃음을 불쾌하거나 불편해 할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늘상 체크해야 한다. 사려 깊음이 필요한 이유다. 아무리 웃겨도 누군가를 짓밟는 유머라면 그건 유머가 아니라 비열함이니까.
따라서 난 늘 ‘코미디는 더 나중에’ 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가장 어려운 장르일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액소>를 하는 동안, 내용과 캐릭터가 침잠하는 종류의 것이다 보니 정서적으로 꽤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좀 웃으면서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혹시 그게 TV시청자들도 금요일 밤 단막에 대해서 원하는 것이 아닐까. (가상의 시청자를 ‘객관적으로’ 떠올려 본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그 가상의 시청자는 종종 나 자신이 되어 있다.) 하긴 나중에 한다고 더 잘 하고 지금 한다고 더 못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그냥 코미디를 해 보기로.
애초에 생각했던 건 풍자가 들어간 신랄한 블랙 코미디였다. 국정원과 일베 소년 사이에 돈가방의 행방을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탈모 청춘 코미디 <머리 심는 날>의 시작은 코믹 잔혹극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