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4. 작가와의 만남
일단 장르와 대강의 구성을 결정하고 나자 머릿 속엔 온갖 좋아하던 영화들이 우글거렸다.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 <파이트클럽>, 코엔 형제의 <번 애프터 리딩>, 우디 앨런의 <환상의 그대>, <블루 재스민>... 그렇다. 뭔가 하드하다. 냉소적이고 어두컴컴하다. 이런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나갈 작가를 찾아야 했다. 어두컴컴한 데서 웃음을 같이 끌어올릴 똘끼 있는 사람. 이번에도 인턴 작가들과 신인 작가들의 대본을 물색했다. 그 와중에 어딘가 모르게 에너지가 충만한데 거칠 게 느껴지는 대본이 있었다. 흥미가 생겨 그 작가의 다른 대본도 다 받아 읽어보았다. 주로 어둡고 강렬한 비방송용 대본을 즐겨 쓰는 분이었는데, 그 와중에 똘끼 넘치는 청춘 코미디 물이 하나 있었다. 판타지 코믹물이었는데, 방송을 내기엔 큰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데도 행간에서 느껴지는 위트가 좋았다. 그렇게 만났다. 백은경 작가를.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대본 작업을 했답니다...로 이어지는 제작기를 언젠가 한 번은 쓰고 싶지만 이번은 아니다. 백 작가는 ‘불러준 건 고맙지만 왜 하필 그 대본을 좋아하셨는지...’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신나게 어두컴컴한 블랙 코미디의 세팅에 대한 썰을 풀었지만, 뭔가 서로의 눈치 속에 핀트는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위에 열거한 잘 만든 영화에 대한 선호도야 크게 다를 수 없겠으나, 디테일한 관심사는 전혀 달랐다. 일베니 국정원이니 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백 작가는 크게 집필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본인이 잘 모르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소재에 대해선 해볼만 하다는 마음이 공유됐다. 사건의 시작으로서 돈가방의 발견!
5. 톤과 장르
‘돈가방’이라는 최진영의 단편 소설이 있다. 갑작스레 돈가방을 발견함으로써 속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형제 부부에 대한 코미디 소설이다. 형제고 가족이어도 재밌겠지만, 완전한 타인이어도 할 얘기가 있겠지만, 그것보단 그게 연인이면 어떨까. 그것도 막 헤어지려던 찰나에 생긴 일이라면?
때 마침 대구에서 한 청년이 현찰을 대로변에 뿌린 사건이 있었다. 백 작가는 돈 가방 이야기는 많으니 좀 다르게 가려면 그 걸 차용해보자고 제안했다. 곧바로 하늘에서 흩날리는 돈다발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서로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모아 일단 그렇게 이야기를 출발 시켜 보기로 했다.
<액자가 된 소녀> 때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인물과 상징적 소재, 큰 틀에 대한 합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그러니까 터는 닦고 벽돌을 올리기 시작했다면 이건 터부터 닦는 격이었다. 사실 ‘돈 가방 영화’는 범죄 소동극 중 하나의 장르라고 할 만하다. 위에 열거한 블랙 코미디들도 그렇지만, 장르라는 건 이야기가 성립할만한 공통 요소들이 있다는 얘기다. 수다 속에서 대본 구성을 출발시키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만, 이게 이 장르를 만드는데 적절한 소재들이긴 한 걸까.
수다는 12월에 떨었으나 난 어디까지나 2014년 연기대상을 준비하며 고 김자옥 선생님의 추모 영상을 어떻게 기획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결국 구체적인 모든 건 1월에 시작됐다. 편성 확정은 그 때까지도 나지 않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40분 2부작 기획이어야 했다. 청춘들이 주인공으로 설정되고, 큰 조직과 범죄의 그림자가 빠지고, 여기에 원래 미담이었던 실제 사건의 흔적까지 합쳐지니 이건 아무래도 어둡고 거친 냉소적 이야기와는 잘 맞지 않았다. 흩날린 돈의 액수, 그리고 주은 돈의 액수에 있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액수가 커야 사건화되기 좋다는 쪽이었고, 백 작가는 작은 액수에 집착해야 더 재밌다는 쪽이었다. 둘 다 이야기는 된다. 다만 장르와 톤이 달라지게 된다. 범죄에 가담되거나 특별히 나쁜 맘을 먹지 않은 청춘들을 블랙 코미디의 대상으로 차갑게 냉소하기엔 지금 이 땅에 사는 청춘들의 현실이 가혹하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의 톤은 ‘청춘 코미디’, 혹은 ’격려담‘ 정도가 더 어울린다. 드라마의 톤을 잡는데 둘은 한참을 우왕좌왕 해야 했다.
작가와 공유했던 가장 큰 정서는 결국 이것이었다. 청춘의 터널을 갓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았더니, 우리 후배들이 또 진창에 발 딛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이더라. 억울한 게 많아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힘을 내야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불안의 시간조차 우리에게 주어진 한 번 뿐인 인생, 청춘이었으니까.
인범이가 돈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답을 찾다가 백 작가가 불쑥 말했다. 얘가 조기탈모인 거에요... 거기까지만 듣고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몇 가지 시시한 아이디어들이 서로의 힘을 빼고 난 후였다. 각종 농구 선수들의 몽타주가 지나가면서 일단 그렇게 가자고 했다. 가자고 하자마자 세 가지 불안이 떠올랐다. 아... 이게 외모 비하로 갈 확률이 높은데... 아...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할까... 아... 캐스팅... 그리고 그 고민은 곧 현실로 닥치게 된다.
백 작가가 탈모 소재를 떠올린 데는 작가의 부군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