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6. 구구절절 편성 이야기
12월 작가 첫 만남
1월 제목도 정하지 않은 대본 1부 (최종본의 절반 분량, 경찰서 씬까지) 수정고까지.
그리고 1월 29일 목요일, 3월 27일 방송을 명받는다.
방송 8주 전.
드라마스페셜 시즌1에 라인업이 된다면 4월로, 아니면 시즌2로 8월 방송일 줄 알았던, (분위기 상 시즌2에 편성될 거라고 확신했던) 나한테는 나름 충격적인 통보였다. 일반적으로 단막극은 괜찮은 대본이 늘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다. 숱한 작품집에 방송되지 않은 단막 대본들이 잠들어 있다. 따라서 급히 편성이 될 경우, 날벼락을 맞은 연출은 그 간 자신이 눈여겨봤던 대본을 부랴부랴 다시 찾아서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바로 제작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달랐는데, 40분 2부작 포맷으로 준비되어 있는 대본은 없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 연출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게 나다.) 시즌1으로 4편이 라인업 됐는데, 그 중 1편이 제작비 문제로 연기되었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대본을 엄정한 계산보다는 편안한 수다로 출발시켰을 때는 시행착오에 대한 여유가 있을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유가 송두리째 없어진 셈이었다.
당시의 난 1부의 완성도에 대한 확신이 아직 충분히 없었다. 톤도 확실히 잡히지 않았고 2부에 대한 상세 계획도 없는 상태였다. 시간 여유가 없더라도 그럭저럭 말이 되는 대본을 만들어 촬영하는 일에 대부분의 드라마PD들은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단막극은 그렇게 만들기가 어렵다. 단막극에는 ‘러닝 타임 채우기’ 식 작법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긴 연속물이라면 캐릭터가 확립된 후 캐릭터 간에 일어나는 일들과 뮤직비디오 성 분위기로 ‘그럭저럭’, ‘적당히 즐길 만하게’ 넘어가는 씬이 연출 가능하다. 오히려 팬들 사이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더 사랑받기도 한다. 단막은 어림없다. 모든 씬이 이야기에 대한 확실한 역할을 부여받고 짜임새 있게 들어가 앉아야 한다. 더구나 작가는 아직 방송을 경험하지 못한 신인 작가. 신인 작가들은 대개가 수정을 통해 방송용 최종고를 만들어 가는 일에 약하다. 당연한 일이다. 안 해봤으니까.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패기 있게 하겠다고도, 용기 있게 못 한다고도 말 못하고 ‘준비는 하겠으나 자신은 없다’라는 식의 말인지 망아지인지 모를 대답을 남기고 필사적으로 대본 작업에 매달렸다. 짧은 시간 내에 집중적으로 엎어치고 메치고를 거듭하다 2월 10일 2부 초고까지 탈고, 간신히 이야기 꼴은 갖추었다. 그러자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다시 돌아왔다. 어쨌든 이야기의 끝은 본 것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 날, 방송 취소를 통보 받는다. 국가대표 축구 시합이 당일 날 편성되어 40분 2부작으로 방송할 수 없어 ‘VJ특공대’를 대체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이게 내가 원했던 건가? 정말? 차분히 생각해 봤다. 이처럼 드라마스페셜 라인업이 안팎으로 어지러운데 8월 단막에 이 작품으로 라인업이 될 수 있겠는가. 바로 다음 달 일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다. 40분 2부작일지, 90분 1부작일지 그 포멧도 예측할 수 없다. (실제로 2015 드라마 스페셜 시즌2는 80분물, 실 러닝 타임 70분대 초반으로 포멧 변경되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급하게 되어 이 작품이 편성 됐지만 그 때가선 또 데스크의 판단이 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데뷔를 앞두고 무섭게 생글생글 에너지를 내뿜던 백 작가의 눈이 떠올랐다.
‘VJ특공대’의 러닝 타임에 맞추면 방송할 수 있었다. 방송 6주 전. 이건 드라마국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현재 내가 대본에 대해 가진 불만 중 하나가 너무 방만하다는 점이기도 했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짧게 다듬는 게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조연출 강민경PD는 오히려 짧은 러닝타임이 기회 아니냐며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VJ특공대 대신 드라마스페셜을 편성하기로 결정된다. 다만 기존의 70분 1편 포맷으로, 그리고 일반적인 70분물보다 러닝타임을 많이 짧게 할 것을 조건으로. ‘머리 심는 날’이 시즌1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단막이었던, 단막 중에도 짧은 편인 실 러닝타임 60분 30초 정도였던 이유다.
편성 확정을 작가한테 알렸다. 백 작가는 내게 임신 사실을 알려왔다... 아니아니, 백 작가의 아이 말이다. 백 작가와 그 부군의 아이. 나와 첫 미팅을 할 때부터 임신 중이었는데 괜히 그 사실을 알리면 같이 일을 안 하려 할까봐 말 안했다며. 임신과 출산을 대하는 일하는 여성의 스트레스가 끼쳐왔다. 당시 나도 임신 중이었다. 아니아니, 내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는 말이다. 백 작가는 7월 예정, 나는 4월 예정이었다. 참으로 생산성 높은 팀이었다.
7. 최종고로 가는 길
임신부이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크게 숨을 몰아쉬고, 씬을 자르고, 압축하고, 바꿔 넣고, 인물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제목도 없던 그 대본은 아직 내가 납득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내가 씨앗을 심었는데 내 자식 같지가 않은 거다. 그래도 인간 같지 않던 상태는 간신히 지난 거 같았지만. 그러니까 대본이.
그렇게 현재 나와 있는 대본의 절반으로 분량을 줄이면서 아예 다시 쓰다시피 하던 사이에 편성으로부터 드라마스페셜 전체가 다 1주씩 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 방송을 앞둔 피디에게 방송 1주 연기는 얼마나 단비 같은 소식이던가! 소식이어야 하는가...... 다른 모든 피디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나만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축구 편성 시간에 맞춰 놓은 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는가. 남들은 1주씩 미뤄져도 난 그냥 그 날 방송 해야지. 덕분에 제일 마지막에 라인업되어 있던 내가 세 번째 방송을 하게 되었고, 김형석 선배의 <웃기는 여자>는 2주의 시간을 벌게 되었다. 뭔가 억울한 건 아닌데 억울한... <액자가 된 소녀>를 할 때는 제작 기간도 심연을 헤엄치는 기분이더니, <머리 심는 날>을 하는 동안은 제작 기간도 블랙코미디 같았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백 작가는 생산성이 무척 높은 작가였지만 (그러니까 대본을 쓰는 속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을 통해 개선을 해나가기엔 시간도 너무 없었고, 의견과 톤도 많이 달랐다. 그게 너무 절망적으로 느껴진 순간, 다른 대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연출이 서로의 미욱함과 어리석음을 대중에 공개하는 것보다 더 큰 악연이 어디 있겠는가. 방송 5주 전. 나는 대본에 대한 굵은 의견, 세세한 수정안 등을 던짐과 동시에 ‘대본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임신부에게도 임신부 남편에게도 잔인한 시간이었다. 그래놓고 백 작가한테 미안했던 나는 백 작가의 다른 대본을 혼자서 수정하기 시작한다...... 설날이 돌아 왔다. 방송이나 공연을 준비하는 연출에겐 명절 연휴가 밉다. 천금같은 준비 기간을 며칠 날려야 하니까. 설이 지나면 4주+@로 남은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이를 어쩔꼬...
설을 통과하면서 다행히 대본에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다. 4주가 조금 넘게 남아있었고 그냥 이 대본으로 끝장을 보기로 결심했다. 난 캐스팅 및 로케이션 헌팅용 대본을 확정했다. 겨우 두 달 전 초롱초롱 선 자리에 선 남녀 같던 연출과 작가는 두 달 만에 산전 수전 다 겪은 이혼 법정 앞의 부부 같은 모습으로 남은 수정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 18일 전에야 책 대본을 확정했다. (물론...연출에게 있어서 책대본도 수정의 끝은 아니지만.)
뭘 그렇게 수정했냐고? 외모 콤플렉스를 대하는 자세와 청춘에 대한 관점, 이야기의 결말과 시청자에게 전달하고픈 정서에 대한 수정과 토의였다고 해두자. 실제로 그랬으니까. 말처럼 심플하진 않았어도.
8. 제목의 출처
그 간 백 작가의 대본들을 보면서 내가 늘 놀렸던 것이 ‘참 제목 짓기 귀찮아한다’는 거였다. 이해할 법 하다. 제목이 먼 저 떠오르는 경우도 있겠지만 집필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딱 함축적인 제목이 안 떠오르기도 하니까.
서로의 시시한 제목 아이디어들을 놀려먹기를 며칠. 나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제목을 던졌다. <머리 심는 날>.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대한 오마주였다.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아이러니. 그러나 비극이 아닌. 이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탈모 얘기를 꺼내자마자 내가 빵 터졌던 것처럼 이번엔 백 작가가 빵 터졌다.
- 좋아요! 그런데 헛갈려요. ‘머리 심은 날’이 더 좋지 않아요?
- 그건 안 돼요. 이미 머리를 심었다는 걸 제목부터 알려주는 꼴이잖아요. 서스펜스가 없어져요. 원래 떠올랐던 건 노래 ‘이사 가던 날’처럼 서정적으루다가 ‘머리 심던 날’이었는데, 이것도 제목이 스포일러라 머리 심는 날로 고친 겁니다.
- 알겠어요.
- 자 백 작가 데뷔작의 제목이 뭐라고요?
- 머리 심는 날! 으허허...
언젠가 데뷔한다면 뭔가 간지 나는 제목으로 하고 싶었을 작가의 허탈한 웃음 소리가 까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