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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제작기 18 - 청춘과 콤플렉스

머리 심는 날

by 행복한 이민자

- 청춘과 콤플렉스

1. 외모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란 참 민감한 문제라서 드라마의 중심축으로 삼기 조심스럽다. 외모를 놀리는 농담이란 기본적으로 상처받는 누군가를 전제하는 농담이기 때문이다. 단발성 아이디어에는 웃음이 날지도 모르지만 고약한 뒷맛을 남길 위험이 있다.

하지만 또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도 없다. 성인이 된 후에는 서로의 외모 콤플렉스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매너다. 그러나 그 어른들은 모두 유년기에 받은 상처와 콤플렉스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언급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 졸업하지 못한 그 상처들과, 그 상처들에 영향 받는 현재에 대해서. 한 발 떨어져서 자기의 콤플렉스를 들여다보면 피식 헛웃음이 나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남성 3대 외모 콤플렉스 비만, 단신, 탈모! 이 중에 비만은 운동과 다이어트로 효과를 볼 수 있다. 단신은 타고 난 거라 신발 굽을 높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탈모는 애매하다. 관리하면 나아지기는 하는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유전이라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발로 커버할 수도 있고, 시술로 커버할 수도 있다. 뭔가 주인공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는 콤플렉스였다.


내 머리털은 잘 붙어 있나... 왼편은 최태환 군. 불법 도박장 촬영 중에)



그리고 탈모의 세계에 진입하니... 그 세계는 넓고도 깊었다. 각종 인터넷 후기를 섭렵한 후 탈모 진행 중인 배우와 후배들에게 조심스레 이런 저런 인터뷰를 진행했다. 질의 응답을 하는 동안의 그 어색한 공기란...... 일단 첫 대답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요’ 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탈모에 대한 스트레스와 디테일한 대처법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바람부는 방향에 따라 고개를 적절히 돌리는 스킬부터 각종 먹는 약, 바르는 약들, 시술과 가발을 알아본 경험... 그러다 불쑥 취재원이 던진 말.

‘그거 아세요? 저 탈모 시작된 후로는 새로 만나게 된 애인의 가슴에 안기지도 못해요.’
‘아니 왜요?’
‘잘 가리고 다녔는데, 그렇게 되면 제 정수리를 내려다 볼 거 아녜요?’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취재원도 울고 나도 울고...그러다 웃고...

얼마나 많은 남자 배우들이 부분 가발을 애용하고 모발 이식 시술을 받는지도 알게 됐다. 단골 미용실 이발사에게 물어봤을 때 역시 엄청 민감하고 조심스럽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와중에 깨달은 것은 콤플렉스를 대하는 남녀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서로의 콤플렉스를 절대 언급하지 않는 매너를 지키는 편이다. 그러나 일단 화제에 올리면 솔직하게 온갖 얘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해 나간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는, 자기보다 아랫 사람에게는 무신경하게 콤플렉스를 툭툭 건드리곤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화제에 올리는 것 자체를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보니 큰 일이었다. 이 작품은 탈모인들을 불쾌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콤플렉스에 대한 ‘맞아 맞아’ 식 공감과 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걸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다. 주인공과 같은 고민을 하는 당사자들이 아예 외면해버리거나 불쾌해한다면 이 이야기는 아무 의미 없었다.

콤플렉스의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방식의 이야기는 굳이 드라마로 필요 없다. 그건 ‘시술 후기’다. 내가 원했던 건 콤플렉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미소 짓는 이야기였다. 나 또한 여러 가지 콤플렉스를 갖고 사는 인간이다. 꽁꽁 숨겨 놓은 나의 콤플렉스를 모두 꺼내 늘어놓고, 그것이 자극 당할 때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점검해 나갔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의 나는, 20년 전의 나는...... 그러면서 가능한 표현의 수위를 조절했다.

2. 청춘물

모든 연출은 청춘물을 꿈꾼다. 너무 섣부른 이야기일까? 아니, 모든 사람은 자신이 몸부림치며 통과해간 청춘의 터널 속에서 건져 올린 답을 소중히 품고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반영된다. 그걸 좀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그게 청춘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청춘물을 꿈꾸었다. 고등학생 때 <비트>를 보고 정우성의 미친 외모에 탄식을 했던 세대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오락실 오토바이 위에서 손잡이를 놓고 눈을 감고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시늉을 했던가. (다시 말하지만 친구들이. 나 말고.)

바로 이 장면...!!

그리고 당대 청춘의 아이콘들. 조니 뎁과 위노나 라이더의 깊은 눈매. 애절한 발라드 가요들. 록과 힙합. 외롭고 불안한 시절을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멜랑콜리하게 견디고 지나가던 그 감성... 아아 어찌 청춘물을 멋지고 폼 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겠는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트레인 스포팅>, <아비정전>, <죽은 시인의 사회>, <고양이를 부탁해>... 괴작이었으나 라디오헤드의 음악과 나른한 듯 퇴폐적인 세기말 정서로 가득 했던 <바이 준>에서 최근의 <파수꾼>까지, 주옥같은 청춘 영화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청춘 이야기에 청춘답게 몰입하는 일이 좀 남세스러웠다. 나의 격렬함은 항상 지나고 나면 늘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게 재미있었다. 격렬했던 감정이 머쓱해지는 시간들. 그러면서 삶에 세상에 던졌던 질문이 조금씩 바뀌어 갔던 것 같다. 그랬다. 원래부터 답은 없었고, 그냥 내 질문을 바꾸는 과정이었던 거다. 결국 지금의 내게 어울리고 또 할 수 있는 청춘물이란 그런 거였다. 그 머쓱함에 대한 것. 질문을 바꾼 후 태도를 다시 잡는 이야기.

<머리 심는 날>에 그렇게 깊은 뜻이? 아니 그냥 이야기를 두드려 맞춰나가면서 유지하고자 했던 관점이 그랬단 얘기다. 나는 이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한 번은 제대로 하고 싶었던 청춘물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코미디로 하게 되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시간도 급하고, 이야기도 어어 하는 가운데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결국엔 난 이 세계를 꽤, 썩, 아꼈다. 인범이도, 화원이도, 기호도. 멋대가리 없고 우스꽝스러워도 괜찮아. 그게 나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청춘이었으니까.

청춘의 에너지는 열정과 울화로 뭉쳐져서 두 방향을 번갈아 향한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거나, 뜻도 제대로 못 펴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할 땐 세상이 그렇게 밉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심할 땐 자신이 그렇게 밉다. 그런데 그게 어디 어느 한 쪽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러다 엉덩이 비비고 앉을 자리를 만드는 순간, 청춘의 터널이 끝났음을 깨닫게 되고, 끝났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 지속된다는 걸 알게 된다. 생긴 대로 깨우친 교훈들을 주워 담은 채로.

참, 밝히자면 나는 영화 <비트> 보다는 허영만 선생의 원작 만화 <비트>의 팬이다. 청춘의 쓸쓸함과 막연함, 그 와중의 깨우침 같은 것들을 참 좋아했다. 내 주인공들도 이 짧은 소동 속에서 청춘의 쓸쓸함과 막연함을 이겨낼 작은 깨우침을 마음에 품고 이야기 밖으로 나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