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 캐릭터와 캐스팅, 변인범
(어? 돈 떨어졌네... )
1. 변인범과 최태환
정말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왜 아니겠는가. 대본을 계속 고치고는 있지만 정말 이걸 할 수는 있을까, 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다. 원인은 탈모남 캐스팅.
최선의 선택은 주인공 인범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배우일 것이다. 분명히 어딘 가엔 있겠지. 그런데 있다 해도 이게 간단하지가 않다.
먼저 인범에게 적당한 탈모 설정이라는 게 어느 정도일까. 일반적으로 방송에 나오는 탈모인은 언뜻 봐도 구분이 확 될 정도로 진행이 많이 된 대머리, 혹은 아예 머리를 밀어버린 알머리 스타일이다. 이미 그 정도로 진행이 된 거라면 가발 말고는 답이 없다. 모발 이식 수술은 탈모 초 중기에, 커버가 가능한 수준의 M자 탈모에 한해서 주로 시행하는 편이다. 따라서 ‘눈에 확 띄는’ 정도보다는 ‘애 쓰면 남들은 잘 모르고 지나가는 수준’이지만 앞머리를 까면 누가 봐도 탈모인 선이 적당하다.
그렇다면 먼저 M자 탈모를 겪고 있는 20대 남자 배우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건 배우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인게, 탈모에 있어선 누구나 이순신이 된다. 나의 탈모를 절대 적에게 알리지 말라. 시술이건 부분가발이건 생명처럼 숨겨야 할 탈모를 대중 앞에 까발린다고? 특히 단막극의 주인공을 노릴만한 20대 배우들은 보통 앞길이 구만리인 유망주들이다. 그런데 배우에게 생명인 이미지를 확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는 본인의 탈모를 대중 앞에 드러내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30대 중반만 되도, 이제 청춘스타를 할 나이는 아닌데다, 자기 자신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여유도 생긴다. 그런데 20대 중후반은 그런 나이는 아니다. 어떻게든 더 나아지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운 나이. 그렇다면 아예 탈모 있는 30대를 캐스팅하면 되지 않을까? 사실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30대 중후반까지 20대 설정의 배역을 연기하는가.
그런데 여기에도 큰 문제가 있으니, 30대가 20대를 연기할 경우, 그 30대가 매우 동안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데, 탈모가 드러나는 순간 바로 노안이 된다. 20대는 30대로, 30대는 40대로 보이게 만드는 게 탈모의 효과 아니던가. 결국은 20대를 캐스팅하는 방법밖에 없다.
탈모가 있는 배우가 자신의 탈모를 밝히기 싫어한다면, 아예 탈모가 없는 배우를 섭외해서 이를 연출하면 되지 않을까? 삭발 시킨 후 가발을 씌운다든가, 있는 머리를 M자로 밀어버린다든가. 그러나 여기엔 또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배우에게 꽤 큰 요구이다. 보통 단막은 7, 8일 정도 촬영할 수 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준비 기간도 길지 못하다. 더욱이 나는 방송 일까지 4주 남짓 남았으니 캐스팅 되자마자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배우에게 단막은 스케줄 상 ‘빨리 치고 빠지는’ 스타일의 프로그램이다. 앞 뒤로 다른 영화나 드라마, CF 스케줄이 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두 탕을 뛰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삭발이나 탈모 수준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꿔버릴 경우, 다른 활동을 전혀 못하게 된다. 영화나 연속물이라면 상당 기간의 제작 및 준비 기간, 그리고 적절한 출연료 등이 지급되면서 아예 맘먹고 포기하고 임할 수 있지만 단막극은 배우 입장에서 상당히 애매할 수 있다.
그리고 미용팀의 우려도 있었다. 캐릭터를 위해 가발로 앞머리 탈모를 연출하는 경우는 가끔 있기는 하나, 단막의 예산과 스케줄에 그런 ‘맞춤형 탈모 가발’을 제작해서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는 얘기였다.
머리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못하겠다는 사람들만 쌓여갔다. 일단 이마가 넓은 사람이라도 절실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그래도 주인공인데 스타 캐스팅’을 이야기했다. 캐스팅용 대본 확정 전부터 주인공 물색에 혈안이었던 내겐 참 꿈결 같은 얘기였다.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귀인이 최태환 씨. 태환이는 <액자가 된 소녀> 캐스팅을 진행할 때 미팅을 한 적이 있다. <밀회>에서 유아인 친구로 나올 때 눈여겨봤었다. 모델 출신답게 길쭉길쭉한 몸매와 해사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이 친구가 이마가 넓던가......
다시 한 번 만나는데 최태환 씨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었다. 응? 이마가 훤해 보이는데?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친구가 의외로 대본에 대한 공감도가 엄청 높았다. 저도 이마가 넓거든요... 하면서 앞머리를 들어 올리는데 내 눈이 한 두 배쯤 커졌나보다. 연출이 너무 솔깃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자 태환이도 흥이 올랐다. 하긴 이번이 첫 만남도 아니고...... 다른 배우들이 이 대본에 대해서는 무척 방어적으로 임하는 데에 비해 최태환 씨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짐짓 결정을 미루고 며칠 후 한 번 더 보기로 하고 자리를 끝냈다.
<액자가 된 소녀>에 이재균 씨를 캐스팅 했을 때, 신인이긴 하였으나 사실 상 적역이었던 이유가 있다. 이미 연극과 뮤지컬 등에서 탄탄히 다져진 바가 있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액소>에서 상림이는 함묵증이어서 대사가 없었다. 몸으로 표현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우울증의 일환을 겪고 있는 배역이라 일반적 드라마 배역처럼 단정하고 통제된 몸짓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단독 주인공도 아니었다. 뮤지컬 배우가 드라마에 데뷔하기엔 상당히 적역이었다. (물론 이재균은 상림 역을 주어진 것 이상으로 훌륭히 표현해냈고, 최근 <미세스 캅>에서도 본인의 가능성을 또 한 번 증명한 좋은 배우다.)
그런데 <머리 심는 날>의 인범이는 대사도 꽤 많고, 드라마의 정서 축을 다 끌고 가는 형태의 인물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주인공으로서의 힘이 더욱 필요했다. <밀회>에서 본 모습과 미팅에서의 리딩 만으로는 그것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마침 최근에 TV영화 <발레리노>에서 주인공을 소화했다고 했다. 탈북자 출신의 발레 천재 역이었다. 그 작품에서 내가 본 건 몰입력과 투명함이었다. 신인의 어설픔이 남아있을지라도, 어딘가 모르게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애매하게 타진 가능성이 남아 있던 다른 대안들을 정리하고 최태환을 인범 배역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결정한 이후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취소될 위기도 있었고, 실제로 촬영도 며칠 밀렸다. 다 쓰자면 구구절절 너무 징그러우니 일단 여기까지.)
2. 탈모인 연출
인범을 캐스팅하긴 했으나 최태환 씨가 인범이 정도의 탈모인은 아니었다. 미용 책임자는 강경희 팀장이었다. 나 1년 차일 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유종선PD 데뷔작 정도는 해주고 싶으나 그 전에 아마 업종을 바꿀 거다’라고 이야기한 전력이 있다. 현재도 열심히 드라마 미용을 하고 계시다. 사실 이 분도 스케줄이 힘들었는데 억지로 부탁해놓고 제대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스트레스도 많이 드렸다.
강경희 팀장과 분장팀의 김경진, 육세리 씨가 붙어 내놓은 방법은, M자 탈모의 깊이를 조금 더 과장하고 광택제로 발라서 탈모 느낌을 준 후, 중앙에 3자 모양을 붙여 탈모 시작 전과 진행 후의 경계 차이를 최대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명, 드래곤볼의 ‘베지터 머리’.
촬영 전에 이 헤어스타일을 먼저 만들어보았다. 거울을 보는 태환이의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태환이의 매니저 팀의 입꼬리도 태환이의 이마 라인과 함께 슬슬 올라갔다. 드디어 완성. 나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된다. 이 드라마는 된다! 태환이는 으허허 으허허 웃으며 자꾸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분장을 완성하자마자 바로 콤플렉스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 같았다.
드라마를 마친 후, 탈모가 더 심한 배우가 했어야 하지 않느냐, 혹은 그렇게 표현했어야 하지 않느는 의견이 있었다. 일리는 있지만 난 이 정도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 콤플렉스라는 게 남들 보기엔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이 본인에게 더 깊게 각인되는 편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감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되지 않을 때 콤플렉스로 인한 스트레스는 극대화된다. 오히려 탈모가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면 단순 희화화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내용적인 문제도 있다. 더 적극적인 탈모는 장기 케어를 해야 한다. 드라마 내용처럼 단발성 시술로 커버가 되는 정도라면 이 이상 과장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탈모 상태를 연출했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앞머리 가발 + 캡 모자, 앞머리 가발+비니, 환상 속에 나오는 장발, 환상 속에 나오는 면접 머리, 실제 면접 당시의 흑채 머리, 이식 수술 직 후의 머리, 마지막 알머리 까지... 파리지옥이 아니라 머리지옥이었다. 분장 미용 팀의 영혼도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단막극이건 연속극이건 간에 이렇게 긴장하며 하루하루가 지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3. 인범의 설정
인범이는 충청도 소도시 출신이다. 적당히 부유한 환경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자영업하는 집의 외아들이다. 부모는 은근히 지역 교대를 가길 원했지만 서울에 가고 싶었던, 그리고 뭔가 근사한 분위기의 전공을 하고 싶었던 인범은 인연도 없는 ‘프랑스문화학과’를 선택해 상경한다. 취업이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몰랐던 시절이다. 그러나 상경 직후 외환 위기에 아버지의 사업도 위축되고 급환으로 돌아가시기에 이른다. 인범이나 인범이 어머니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본래의 성격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집의 경제적 계급이 확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불어는 정말 잘 하지 않는 이상 쓸 데가 없다. 정말 잘 한다 해도 취업 자리가 많지가 않다.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친구들이 하는 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나... 한다고 될까... 아 난 하고 싶은 게 뭐였지... 성격 밝고 낙천적이어서 대체로 주변의 사랑을 받아온 인범이에게는, 크게 욕심 부리거나 야심을 품지 않는 호인이었던 인범에게는, 쉽사리 넘기 어려운 어른으로의 진입 관문이었다.
가뜩이나 상황도 어려운데, 군대 제대 이후 머리 나는 게 예전 같지 않다. 훤칠하고 스타일 나는 몸이 장점이었는데, 이마 라인이 점점 올라가니 뭘 입어도 모양 빠지게 느껴진다. 일도 잘 안 풀리는데 점점 마음이 위축 된다. 아... 나에게 탈모가 올 줄이야... 탈모를 치료하면 자신감도 회복하고 자신감 회복하면 면접 쯤은... 그냥 붙지 않을까? 응?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