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4. 봉화원과 하은설
인범이와 화원이의 성은 각각 변과 봉이다. 그냥 듣기에 재밌는 희성을 가져다 쓰려고 붙인 것은 아니다. 예전 친구 중에 변 씨 성을 가진 여자와 봉 씨 성을 가진 남자가 있었는데, 우린 그 둘이 모이면 ‘이게 웬 봉변이야~’라고 하곤 했다. 일명 봉변 커플. 사실 그게 재미있어서 굳이 성을 변과 봉으로 붙인 거였다. 봉변 유머를 한 번 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결국 대본을 마무리하는 단계까지 그 지점을 찾지 못했다.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애드립이라도 쳐보려고 했는데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성은 하지 못한 농담의 흔적이다.
화원이의 키 이야기는 처음엔 없었다. 이야기의 짜임새 있는 마무리를 고민하면서 하나 둘 맞춰나간 조각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처음 화원이 캐스팅을 생각했을 때는 아담한 친구들보다는 큼직한 친구들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스튜어디스 지망생들이니까. 인범이 캐스팅에 골머리를 앓던 동안, 화원이의 외모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나니 가능한 여배우의 폭이 엄청 좁아졌다. 키가 지나치게 특이사항으로 보일만큼 작아선 안 되지만, 그래도 중 키보다는 아래 느낌의. 이 역시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았다.
그 동안 괜찮은 활동을 선 보였던 아담한 여배우 몇과 스케줄과 출연 의사를 타진하던 어느 밤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캐스팅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도저히 화원에게 적역인 배우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마구잡이로 이런 저런 검색을 거듭하던 중, <유나의 거리>에서 ‘윤지’ 역을 했던 배우의 클립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여자 소매치기 단으로서 김옥빈 씨 후배 역이었는데, 그 말투나 표정이 딱 내가 기대하던 화원이었다. 하은설. <유나의 거리> 본방 때는 앞부분만 봐서 윤지 등장 파트까지 보지 못했던 거였다. 이런 배우가 있었다니. 나는 바로 캐스팅 디렉터에게 배우 미팅을 요청했다.
하은설 씨가 들어서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봉화원이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도 이 날 만나고 캐스팅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 중에 외모 콤플렉스와 키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키 때문에 오디션에서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 때마다 너무 억울했다는 거였다. 어느 미팅 후 키 얘기가 또 언급됐을 때, 이렇게 항변했다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 키가 송혜교 선배님 하고 같거든요? 제가 못할 게 뭐가 있나요?’
그런 윤지 같은 당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콤플렉스가 있기에 더 딱 부러지게 극복을 하고자 하는 패기, 혹은 긍정적 욕심. 그런 눈빛이 화원이를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마 속에서 면접으로 형상화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건 배우의 삶이기도 하다. 수많은 젊은 배우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때로는 모욕적인 느낌을 받기도 한다. 찧고 까부는 역할이라고 해도 그 둘이 순간 진실하게 좌절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건 그 좌절이 그들이 겪고 극복해온 삶이기 때문이다.
5. 화원의 설정
<유나의 거리> 윤지 역을 보고 캐스팅하긴 했지만 윤지와 화원은 성격이 다르다. 윤지는 단순 담백하게 리더에게 충성하는 스타일이라면, 화원은 계획하고 따져보는 스타일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남자친구 인범에겐 미래가 없다, 더 정 붙기 전에 헤어지는 게 상책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스타일. 그것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치밀하지 못해서 탈이지만.
화원이는 스튜어디스 학과를 나왔다고 설정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부모가 남동생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대학을 호주로 유학 갔다.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는 계획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 자기는 아무리 부모가 사장이라도 갈빗집 캐셔를 하고 있는데, 남동생은 유학생이니 왠지 남녀 차별을 당한 것 같아 기분 나쁘다. 그러게 진즉 취직이 됐어야 당당한데!
친구 따라 성형외과에 몇 번 들락 거렸다. 아무래도 외모가 중요한 직업이니까 이건 투자이자 관리다. 눈과 코를 아주 살짝만 만졌는데 얼굴이 훨씬 섬세해진 것 같다. 역시, 다들 이러니 가만 있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게 아니겠나.
애초에 화원이의 계획에는 인범이 같은 남자는 애인 후보에 들지도 못했다. 싱겁게 불판 가는 알바생으로 왔을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자기만 보면 싱겁게 웃으며 긁적긁적 하는 이 남자. 모자를 엄청 좋아하는지 대체 벗지를 않는 이 남자. 평소에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보면 나한테 관심 있나 보지? 흥, 어딜 넘봐. 뭐... 키 하난 맘에 드네.
스튜어디스 시험을 재수하던 시절,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 친구의 합격 소식을 SNS로 확인했다. 갈고 있던 불판을 떨어뜨렸다. 다시 주우려다가 손톱이 부러졌다. 손님이 다 빠져나간 오후였다. 자꾸 눈물이 솟았다. 인범이 뛰어왔다. 괜찮냐며, 다치진 않았냐며. 그 말에 그냥 목 놓아 울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화원은 인범의 가슴에 안겨 펑펑 울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잠시 나가셔서 둘 만 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연애가 시작됐다. 아아 근데 인범은 딱 예상만큼 무능하다. 아무래도 난 스튜어디스를 곧 붙게 될 텐데, 그러고 나도 인범과 사귀고 싶을까? 그런데 붙고 헤어지면 내가 너무 나쁜 년이잖아. 그러니까 붙기 전에 솔직하게 먼저 헤어지자고 할까? 아 그런데 저 해맑은 표정을 보면....... 아... 일단 붙기는 해야 할텐데...
6. 박기호와 장성범
장성범은 추천을 받은 경우다. 내용 상 인범이가 기호에게 위축되어야 해서 인범이를 좀 아담하게, 기호를 좀 덩치 크게 가고 싶었다. 성범이는 덩치가 크지 않아 처음엔 좀 갸웃했다.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를 비롯 성범이가 출연했던 전작의 연출들은 대체로 이 친구가 괜찮다며 추천했다.
성범이와의 미팅도 잊을 수 없다. 마침 일이 있어 로비에 내려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성범이와 같이 탔다. 나는 그 친구 얼굴을 알지만 그 친구나 매니저는 나를 모르는 상황. 엘리베이터 안에서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 연출이 너 덩치가 설정보다 좀 작다고 하는 것 같더라.
- 아... 복싱하는데 나보다 더 크면 불리한데... 뭘 모르시네...
푹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같은 층에 내리자 매니저는 나에게 <머리 심는 날> 사무실을 물었다. 따라오시라고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밝혔다. ‘사실 제가 연출인데요...’
미팅을 진행하는 동안 성범이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위축되지 않았다. 실제로 몇 년간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95년 생으로서 믿기지 않는 노안을 자랑하는 이 친구는 말투나 성격도 마치 80년대 고등학생이 타임머신을 타고 2015년으로 온 것 같았다. 내가 묻는 말에 계속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는데, 주로 자기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거의 못 들었는데도 흐뭇한 미팅은 처음이었다. 너무 기호 같았기 때문이다. 미팅을 끝내고 배웅해주는데 장성범은 뭐가 아쉬웠는지 갑자기 나를 마주 보더니, ‘아 기호 이거 딱 난데!’ 하고 나갔다. 그래, 딱 너더라. 너 해라.
기호의 설정은 대체로 극 안에서 설명 되었다. 쌈박질 하다 어깨를 다친 복싱 유망주. 폭력적인 도박꾼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 참고 사는 어머니에 대한 답답함. 장성범은 실제로 격렬한 열정과 분노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듯한 친구였다. 진지하고 신실한데, 그 모습 그대로가 귀여웠다. 방송이 나가고 난 후 따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때 성범이는 취해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학을 하며 괴로워했다. 나는 연출 답게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자학을 자세히 들어보니 딱 나를 지목하지 않았다 뿐이지 술기운과 함께 점점 연출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할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순발력 있게 위로를 마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는 후일담.
7. 세 명의 주인공
주인공 셋을 뽑아 놓고 보니 전부 신인이었고, 시청자에게 낯선 편이었다. 주변의 우려가 상당했다. 셋을 모아 놓고 내가 느끼는 가장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대개 캐스팅이란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포기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신인인 경우엔 그 이후 대안으로 캐스팅 될 때가 많지. 너희는 모두 신인이고, 단막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너희는 대안이 아니야. 너희는 이 배역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역들이야. 그래서 너희 셋을 처음 모아놓고 보는 지금 내 마음은 무척 설레고 행복하다.‘
그 셋은, 내 청춘의 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