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 드라마 제작기란
- 연출의 드라마 제작기란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상세한 제작기를 남겨 두고 싶은 것이 연출자의 욕심이지만, 막상 연출을 하고 나면 제작기를 남기기 애매한 상황이 된다. 연출 입장의 제작기라는 것이 다음 네 가지 분류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먼저 자화자찬이다. 못나도 내 새끼라고, 작품을 현실화 시켜 놓은 것이 좋아서 까무러치는 것이다. 작품을 좋게 본 사람들도 민망해지고, 안 좋게 본 사람들에겐 우스운 노릇이다.
다음은 자학이다. 작품을 다시 돌려보면 더 잘 할 수 있었던 부분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한정된 제작비와 제작 시간에 쫓기기에 알면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부분은 두고두고 괴롭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생각나는 대로 꺼내놓게 되면 역시 민망해진다. 좋게 본 사람들에겐 머쓱한 노릇이고 안 좋게 본 사람들에겐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위의 두 분류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면 다음 두 가지는 같이 만든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공치사. 아,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배우가 좋았고 어떤 스태프가 좋았고....... 누구 덕분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걸출함이 성취되었고...... 연출이란 직업의 특성 상 혼자 하는 일 없이 다 누군가를 통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야 모두들 고생했으니 특별히 태업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노력과 성취를 격려 하는 것이 도리이고, 실제로 그들의 성취가 작품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지나치면 재미없는 자화자찬과 자아도취의 연장일 뿐이다.
다음은 저격. 위의 반대인데, 연출 자신은 눈부신 전망을 보고 있었으나 같이 하는 누군가가 다 망쳐놓았다는 식으로 분함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 역시 직업 특성 상 모두가 자기 마음 같을 수는 없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과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 일상다반사인지라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역시 입 밖에 내기 시작하면 꼴사납고 무의미한 일이 되기 쉽다. 위의 분류 중에서 자학이 향하는 곳이 궁극적으로 다른 이에 대한 저격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제작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분류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결국 나도 제작기를 쓰다보면 결국 이 분류에 발을 담그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자신에게도 경고를 주고, 혹시나 읽는 사람이 느낄 불쾌함이나 머쓱함을 미리 줄여보고자 함이다. 결국 제작기란 게 그렇고 그런 것이다. 객관적 백서를 지향하지만 실상은 ‘나 잘했죠?’와 ‘나 억울해요’ 사이 어디쯤 애매하게 멈추는.
작년 가을, 데뷔작을 만들어 놓고 나서 뭔가를 기록하자니 정리 되지 않은 마음의 소용돌이를 기록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두 번째 작품을 만들어 놓고 나면 좀 뭔가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때 지금의 정리되지 못한 것들을 차분하게 풀어보자고. 이제 두 번째 단막이 방송되고 나니, 나와의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다. 비록 제작기라는 것이 각종 함정이 있는 장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상황에 대한 기록과 연출자의 주석을 다는 정도의 일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기록한다. 드라마국에 들어와 8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두 편의 단막에 대한 제작기를. 드라마 스페셜 <액자가 된 소녀>와 <머리 심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