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 로케이션, 미술
1. 로케이션
변두리 도시 마을의 느낌인데 ‘봄직한’ 느낌의 동네를 찾는 것이 목표였다. 유형우 섭외 부장님이 수원의 한 동네를 찾아오셨다. 귀여운 골목골목이 좋았다. 재개발이 어렵자 재개발 대신 리모델링을 선택한 동네다. 도시 변두리의 서정과 귀여운 디자인 아이디어들이 잘 살아 있는 곳이다.
2. 세트 디자인
아트비전의 이병준 감독님이 디자인을 맡았다. 연극원 무대미술과 출신이라 입사 때부터 언젠가 한 번 꼭 같이 일해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병준이 형은 이 작품을 끝내고 퇴사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 학연 자체는 아무 의미 없지만, 방송 제작의 방어적 프로패셔널리즘에 지쳐있을 때 예술학교 다니던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 기운을 조금 북돋우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난 재학기간이 워낙 짧았기에 아쉬움에 더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다.
이병준 디자이너와 가장 길게 협의 한 것은 독서실 세트였다. 좁고 긴 복도와 두 명이 침대 위 아래로 누우면 가득 차는 방. 그리고 공동욕실의 피로함. 방송 제작에 맞으려면 조명과 속도 있는 촬영의 필요성 때문에 좁은 공간을 연출해야 할 때도 넓게 짓게 된다. 실제로도 좁게 지으면 촬영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시원을 넓게 지으면 그 공간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적절한 좁음’을 찾아내는 게 문제였다. 병준 형은 내 머리 속을 옮겨놓은 듯한 고시원을 지어주셨다. 더 많은 컷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대본 표지도 병준이 형이 신경 써서 디자인 해주었다. 귀엽고 유쾌하게.
3. 분장 미용
더 말할 게 있을까. 단막극 단위에서 보면 이건 일종의 머리 분장 쇼에 가까웠다. 정해진 예산 아래에 가발을 포함해서 여러 디테일한 헤어스타일을 연출하는 일도 어려웠겠지만 촬영 스케줄에 맞춰 그 스타일을 준비시키는 것도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탑 크레딧에 이름을 올려드렸다. 그럴 자격, 충분하다.
4. 소품
아트비전의 최종길 씨를 처음 만나 작업했다. 일단 잔디인형을 구하는 것과 지폐 소품으로 일이 시작됐다. ‘절룩거리네’ 노래 시퀀스 중에 나왔던 병원 앞 ‘자신감을 심어드립니다’ 배너는 소품 팀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것이다. 자세히 보면 갈빗집 캐셔 자리에 화원의 꿈을 표현할 비행기와 스튜어디스 인형도 놓여 있다. 이 역시 소품 팀의 아이디어다.
5. 의상
기호의 의상이 문제였다. 카고 바지에 집업 저지를 입기로 회의를 끝났으나 배우 개인 옷을 입힐 순 없었다. 옷이 훼손되기도 할뿐더러 대역 때문에 같은 의상이 더 필요해서 의상팀 의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촬영 첫날 기호의 의상이 정작 기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데에 있다. 컨셉이나 색상은 비슷한데 디테일과 톤이 달랐다. 카메라를 한 번 대면 연결 때문에 끝까지 이대로 가야 하는데, 기호는 옷을 갈아입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결국 촬영을 중지하고 급히 근처 스포츠 의류점으로 보냈다. 다른 씬을 먼저 당겨 촬영하면서 사진으로 의상을 픽스해서 간신히 첫날 촬영 스케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시원 밤씬을 잘 보면 기호가 옷을 갈아입을 때 호랑이 트렁크 팬티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호의 취향이다. 특별히 부탁한 디테일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렀다.
화원에게 야상점퍼를 입힌 건 돈 집어넣기 좋기 위해서였고, 그 안에 후드를 입은 건 사실 급히 시술 받은 얼굴을 가리는 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술 받은 직후를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그 씬의 구실도 좀 애매해서 결국 편집되었다. 통 씬이 편집된 건 딱 하나였는데 결국 화원이가 당첨.
인범이는 모델 출신답게 무슨 옷이나 모자도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블루종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허허실실 인범 다웠다. 비니는 좀 더 봄 가을용 비니를 씌우고 싶었는데 당시가 겨울 끝 무렵이라 두터운 비니 투성이어서 딱 원하는 질감의 비니를 찾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의상 협의를 할 때는 고급 의상보다는 이렇게 일상적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더 즐겁다. 고급 의상은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꺽다리 허당 인범, 스포츠 인상파 기호, 방울 토마토 화원, 도시 변두리의 청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