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 스타의 이름에 대한 해명
‘머리 심는 날에 정우성 이병헌 송혜교 있다.’
기자간담회 이후 나갔던 기사 중의 하나다. 조금 당황스럽고 조금 부끄러웠다. 우리와 무관한 스타의 이름에 기대 단막극을 홍보해 보려고 하는 심산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전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모든 건 현장에서의 연기 호흡에 대한 한 기자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 대한 태환과 성범의 대답이 ‘감독님이 우리를 정우성과 이병헌이라고 하셨어요.’였다. 아니 이건 뭔가 해명이 필요하잖아. 중언부언 나의 해명에 기자 분들이 귀신 같이 뽑은 표제였다. 전말은 이랬다.
올 해는 단막극의 정규 편성이 없어지고 부정기 편성으로 돌아선 해였다. 성과에 따른 단막극 생존에 대한 압박과 불안이 팽배했다. 그러니 캐스팅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역 적합성이 높다 하더라도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진다면 금요일 밤 황금 시간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써 걱정을 사게 마련이다. 공중파와 케이블의 난다 긴다 하는 예능이 편성된 시간 아닌가. (정글의 법칙, 나는 가수다, 삼시 세끼 등등...) 그러나 이런 부분은 작품의 최선에 대한 연출의 판단만 확실하다면 설득을 통해 어느 정도 돌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묘한 기류까지 일일이 다 관리되지는 않는다. 야외 촬영을 나갈 경우, 현장 스태프들은 누구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질문을 받는다. 뭐 찍어요? 영화? 드라마? 드라마요. 제목이 뭐에요? 무슨 드라마에요? 드라마스페셜이라고, 단막극이에요. 응... 그렇구나... 누구 나와요? 신인이에요. 알 만한 사람 없어요? 네 뭐 별로... 흐응 그렇구나...
배우의 인지도는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누가 나온다’가 확실하면 기획 편성의 설득력 못지 않게 현장에서 드라마를 설명하기 편리해지는 거다. 물론 이 편리가 훌륭한 작품으로 이어지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다만 드라마를 이야기가 아닌 단순 상품으로 봤을 때, 상품 설명이 좀 짧아지는 이점은 있다. 스타가 나올수록, 유명한 드라마일수록 행인의 질문에 스태프의 대답이 힘 있어 진다.
갈빗집 앞을 촬영 하고 있던 때였다. 우스꽝스럽지만 애환이 느껴지게끔 대사 처리를 해야 해서 배우들이 꽤나 지쳐있던 때였다. 지나가던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여기 누가 나오냐고 스태프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처럼, 단막극이고, 신인이고, 중견배우는 이한위 씨가 나오고, 저 친구들이 주인공이고... 나름 성실하게 행인의 호기심을 풀어줄 수 있을 법한 대답이 이어는 것이 들렸다. 그런데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한 여자 분이 조용히 남편으로 보이는 옆의 남자에게 물었다. 왜? 누구래? 그러자 한 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남자가 그간의 톤과는 다르게 훨씬 큰 목소리로, 현장 스태프와 배우들까지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됐어. 배우도 아냐.’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명백하게 전체가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참 비열한 인간이었다. 혹시나 스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을 때는 호기심 어린 구경꾼 노릇을 하더니, 원하는 정도의 스타가 없다고 판단되자 제작진 전체를 깔아뭉개는 말본새라니. 순간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얼른 다스렸다. 이 정도에 흥분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배우들이 이 말을 들었을지 걱정됐다. 하지만 혹여 들었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냥 서로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촬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옥상 씬을 찍을 시간이 돌아왔다. 인범과 기호가 멱살잡이를 하며 다투는 씬. 배우들의 진솔하고 강렬한 에너지가 필수적인 씬이었다. 그런데 인범과 기호는 많이 지쳐 있었다. 잘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신도 서지 않고, 사기도 많이 떨어진 눈치였다. 대사건 연기건 계속 NG가 났다. 배우들이 자신감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지금까지 쌓여온 모든 것을 터뜨려야 할 씬에 배우들은 몸과 마음에 힘이 빠져 있었다. 혹은, 길을 잃은 듯 보였다. 나는 자꾸 그 비열한 행인의 올라간 입 꼬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하은설이 과거 캐스팅 미팅 때 했다던 항변도 생각 났다. 키를 트집 잡히자 했다던 말. ‘그게 문제라면 사실 저나 송혜교 선배님이나 별 차이 없는데...’ 나는 태환이와 성범이에게 다가갔다.
누가 뭐라건, 지금 이 현장에 있어서 너희는 내게 최고의 배우야. 지금의 내게는, 이 드라마에 있어서는, 태환이는 정우성보다 소중하고 성범이는 이병헌보다 훌륭해. 너희가 이 드라마의 최고고 전부야. 그러니 그걸 보여줘.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집중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큐를 외치다가 나는 이번엔 다 들리도록 빽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머리 심는 날의 정우성이고 이병헌이야. 사람들이 너희 신인이라고 수군거리는 거 억울하지도 않아? 연기로 다 죽여 버려. 알았어?
배우도 스태프들도 집중력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야, 그 다음 날까지 연결해서 찍고 나서야 그 씬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씬에서 마지막 추진력을 받아 <머리 심는 날> 결말까지 달릴 수 있게 된다. 기호의 사연과 인범이의 절실함과 깨달음, 그리고 화원이의 좌절과 눈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내 청춘물의 주인공답게 존재했다.
이것이 <머리 심는 날>에 우리와 무관한 스타의 이름이 거론된 이유다. 이것이 기사의 표제가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해서 조금 민망하다. 기왕 거론된 김에, 세 주인공의 앞날이 이 스타들 이상으로 밝기를 바란다.
참, 장성범과 최태환은 이병헌과 정우성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뽀빠이와 올리브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