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심는 날
(여의도에 해가 지면... 방송이 임박...)
- 방송 당일
48시간을 연속으로 편집했다. 드라마 판에선 거의 모든 작품에서 늘 있는 일이라 새로울 건 없는데, 직접 하게 되면 또 늘 새롭게 졸린다. 정말 졸린다. 진짜 졸린다... 졸린다...
선배들이 몰려서 제작하는 걸 보며 내 차례가 되면 절대로 여유를 확보해서 후반 작업에 공을 들이겠다고 다짐했으나, 두 번째 단막 만에 와장창 무너져 날밤을 새며 편집점을 고민하고 있자니, 자조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도 시간을 잘라내는 게 지옥이었다. 마지막 5분 정도를 잘라내기가 진짜 힘들었다. 61분 정도가 완성됐고 이 정도면 일반 단막보다는 꽤 짧은 길이였다. 이틀 꼬박 편집을 하고 나니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처음엔 <액자가 된 소녀> 때처럼 ESMR에서 오디오 중심 최종작업을 하며 파일로 마무리하겠다고 큰 소리 쳤다가, 결국 일정이 턱도 없이 밀려 제작 편집실에서 테이프로 종합편집을 하게 됐다.
사실 몰렸다 몰렸다 하지만 방송을 내는 데에는 별 무리 없다고 생각했다. 당일 찍어서 당일 내는 스케줄을 연속극에서도, 대하사극에서도, 미니시리즈에서도, 심지어 단막에서도 경험했던 터였다. 연출에게 주어진 숙고의 시간이 짧아지는 게 아쉬워서 그렇지 단막극 방송 3일전 촬영 종료면 방송쟁이로서는 해볼 만한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변수는 당일 날에 다 몰려 있었다.
먼저, 방송 당일 아침에 특수영상의 최종 수정을 협의 했다. 거진 다 되어 있고(있다고 생각했고) 몇 부분의 간단한 수정만 거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수정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지, 현재 작업 완료율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통제하고 계산을 세우고 있지 않았다. 나도 워낙 계속 같이 하던 팀이라 그냥 믿었다. 결국 특수영상 컷들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데에 점점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기자간담회가 당일 날 잡혀 있었다. 기자간담회에 쓸 시간이 사실은 없었지만 연출이 빠지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처음에 나는 시작할 때만 있다가 배우들을 남겨놓고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기자간담회가 시작되니 질문에 대한 정리 발언을 내가 하는 상황이 되어 빠져나올 타이밍이 좀체 없었다. 게다가 ‘제작이 급해서...’라고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빠져나오려니 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결국 기자간담회가 무려 1시간이 진행되도록 계속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타격은 축구와 광고로 인해 러닝 타임을 추가로 더 줄이라는 요구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당일 날 러닝 타임을 다시 40여초 정도 빼 냈는데, 파일 기반 작업이 된 이후로 러닝 타임이나 편집점이 변하면 모든 후반 스태프들이 새로운 파일을 공유해서 재작업을 해야 한다. 미니 시리즈들이 늘상 하는 일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니 시리즈들은 이미 손발이 맞은 상태에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지만 단막은 손발을 맞추나 싶으면 끝이다.
우리 후반팀은 대체로 조용조용하고 예의바르고 배려가 있는 분위기였다. 막 보채고 서둘러봤자 마음만 불안하지 바쁠수록 차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난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분위기가 독이었다. 다들 서로를 애매하게 믿고 배려하는 가운데 시간이 한정 없이 늦어졌는데, 조연출 승기는 이를 관리하면서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음악 편집을 확인한 후 제작 편집실로 들어간 시각이 일곱 시 오십 분. 방송까지 두 시간 여. 주욱 테이프로 복사해서 넘기는 정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편집실에서 내려온 첫 테입이 십 오분 정도의 분량 밖에 되질 않았다. 나는 편집실에 전화했다.
‘왜 테입이 쪼개져 왔지? 앞 테입이 왜 이렇게 짧아? 뒷 테입은 언제 내려오니?’
‘언제 갈지 모르겠어요.’
‘뭐? 그럼 한 번만 쪼개지면 되는 거야?’
‘몇 번을 쪼개야 할지 모르겠어요.’
초 비상이었다. 다들 될 거야, 될 거야 하다가 중간 중간에 생긴 작은 지연과 변수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 상황이 된 거였다. 무슨 웹드라마도 아니고 종편실에서 우린 허겁지겁 테입이 내려오는 대로 오 분 십 분씩 조각조각 이어 붙였다. 그리고 방송 시간이 다가오자 일단 앞부분 40분 정도의 완성본을 먼저 주조로 보냈다. 아 내가 테입을 쪼개 보내는 지경에 이르다니.......
후반부 테입을 제작하는 동안 시계는 열 시를 가리켰고 조금 전에 보낸 테입이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겪어도 겪어도 이 또한 초현실적인 일이다. 아직 제작을 하고 있는데 TV에선 방송이 나가고 있다. 저게 진짜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동 시간에 보고 있는(볼 수 있는) 송출 화면이 맞단 말이지?
마지막 씨퀀스를 붙이고 있는데 결말부의 약속된 자리에 음악이 없었다.
‘여기 왜 없어요!?!!!!’
나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다들 움찔했다. 머리를 굴렸다. 다시 음악을 찾아 삽입하는데 3분, 아니 1분이면....... 작업하려는 찰나,
‘그냥 가 시간 없어!!!!’
프로듀서의 결정이었다. 하릴 없이 테이프는 결국 떠나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특수영상 컷 몇 개, 색보정 컷 몇 개, 그리고 음악이 하나 빠진 테입을 들고 승기와 함께 택시를 타고 주조로 향했다. 음악 팀도 급히 최종 정리를 하다가 빠뜨린 거였다. 그렇게, 간신히 방송은 나갔다.
방송이 나간 후, 난 <머리 심는 날>을 조금 보완했다. 특수영상과 색보정 컷을 보충하고 음악 하나를 추가, 하나는 교체 했다. 음향 효과도 몇 군데 손을 봤다. 재방송, IPTV, 콘피아(www.conpia.com, kbs 인터넷 다시보기 사이트) 등에는 수정본이 나가게 된다. 그러나 불법으로 떠돌아다니는 파일은 아마도 본방용 파일일 확률이 높다. 너무 당연하지만 다시 보실 분이 있다면 공식 루트로 수정본을 보기를 권한다. 본방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 아리다. 수정본과 비수정본의 파일 구분을 하려면, 맨 뒤의 스태프 스크롤을 보면 된다. 본방 비수정본은 스태프 스크롤이 이름은 연하게, ‘출연’ ‘촬영’ 등 역할을 나타내는 폰트의 가장자리는 진하게 처리되어 있고, 수정본에는 전체 스크롤 글씨가 전부 연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건 무슨 조던 운동화 진품 가품 확인하는 노하우도 아니고...) 또, 연출자 소개 탑 크레딧이 고시원 사장실 안에서 나오면 방송본, 더 늦게 인범이 방 안에서 나오면 수정본이다. 참고하시기를. 이 두 가지를 빼고 차이를 세 군데 이상 발견하시는 분께 경품을.......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