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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제작기 27 - 고시원 블루스

머리 심는 날

by 행복한 이민자

- 고시원 블루스

새벽 여섯 시에 세트장에 도착했다. 세트장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인범의 고시원 세트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좁은 고시원 세트는 내가 과거에 잠시 기거했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와 9와 숫자들의 ‘유예’를 번갈아가며 들었다. 처음 고시원에 있었던 고3 때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노래와 함께 청춘이라 이름 붙일 만한 십수년의 세월이 찬찬히 그려졌다. 내 인생에 서른 살이 실제로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부터, 업계에 들어와 드라마 일을 하기까지의 시간들. 내 한 몸 누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었던 작은 공간의 포근함. 고시원 천정을 쳐다보며 나는 무엇을 꿈꾸었던가.

고시원 세트는 한 면이 촬영을 위해 뜯어져 있었다. 그 밖으로 세트 천정의 조명 바통들이 보였다. 초현실적이었다. 나는 고시원에 있는가 세트장에 있는가.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내가 꿈꾸던 미래를, 그 미래 속 세트장에 같은 고시원을 지어 놓고 다시 꿈꾸고 있는 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씩 스태프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과거는 미래를 어떻게 써 나갈지를 꿈꾸고, 미래는 과거를 어떻게 다시 쓸지를 꿈꾼다. 내게 현재가 도로 스며 돌아오고 있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자신에게 허락된 좁디좁은 공간에 대한, 좋기도 싫기도 한 모순적인 감정을 태환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 약해진 기호. 그리고 기호를 무서워했으면서도 이 상황에선 또 해맑게 형 노릇을 하는 인범이가 침대 위 아래로 누워 대화를 나누는 이 씬을, 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머리를 심고 난 후, 인범은 방 안에 돌아와 화원과 기호의 환상을 만난다. 인범이 마음의 소리랄까. 그 씬을 찍을 때 공간이 좁아 고시원 세트의 이 벽 저 벽을 뗐다 붙였다 하며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배우 화보에서 대머리를 매직으로 덧칠하고 있는 불안한 표정의 인범을 보며, 나는 문득 낮게 탄식을 흘렸다.

아이고 인범아... 너의 세상이 정말로 너무 좁구나.


곧 쫓겨날 고시원 방 하나와, 너를 차버린 여자 친구, 그리고 너한테 돈을 빼앗았던 동네 건달 동생이, 지금의 너를 가장 잘 알아주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구나.

나의 세상도 그렇게 좁았을까? 청춘의 성장통이 사실은 이다지도 비좁은 관계와 공간 속에서 솟아난 아픔이던가. 지금 나의 세상은 과연 넓어진 걸까. 세상 넓은 걸 보기도 전에 웅크려버린 영혼. 그 등을 쓸어준다 해서, 그 손짓만으로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을까. 윤도현의 노래였지. ‘너를 보내고’.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던, 옛 친구 몇몇이 떠오른다. 비관적인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듯한 인범이는, 이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환상 속 팬션의 장발 가발 씬을 마지막으로, 모든 촬영이 끝이 났다. 방송까지 3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편집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