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가 된 소녀 / 머리 심는 날
이제 한 달 반만 있으면 데뷔작은 방송 1주년이 된다. 두 번째 단막은 반년이 되었다. 제작기를 다 쓰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프롤로그에 썼던 제작기의 위험에 적당히 발 적셔 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이런 제작기를 공개적으로 계속 쓰는 일은 다른 이유로 더 어려울 것이다. 협업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제작기의 기록 한 줄도 참여한 사람의 역할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낳게 된다. 누군가에겐 저격이거나, 오해이거나, 비밀이거나,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없이 해결된 일들은 쓰기는 좋아도 기록의 가치가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쓸 것이 많을수록 더욱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도 이 단막극 제작기는 나와의 약속이었다. 내게 주어진 두 번의 단막극, 잘 곱씹어 기록해 놓고 싶었다. 어쩌면 하나의 졸업 작품과 하나의 방송 데뷔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액자가 된 소녀>는 악기 치고 연극하던 시절부터의 나를 꽉꽉 눌러 담으려고 했던 일종의 졸업 작품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든 것이라 그 시간 내내 쌓인 의미와 책임, 그리고 연출에 대한 나의 모토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부담이 컸다. 출사표이자 중간 정리였다.
반면 <머리 심는 날>은 오랜 시간의 짐은 훌훌 털었으나 너무 급하게 착수된, 그리고 보다 편안하게 보도록 기획된, 그야말로 ‘방송 데뷔작’ 같았다. <액자가 된 소녀>보다는 작품과의 심리적 거리를 더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액소>가 스승과의 인연이 내 삶과 포개졌다면 <머심날>은 첫 출산과 포개져 결국 또 바짝 내 삶과 붙어 버렸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이 나와 거리를 유지하다 덥석 포개지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단막극이 TV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갖는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래도 이 장르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고자 했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화려한 구경거리가 있는 굿판이 드라마의 전부는 아니다. 구구절절 사연 많은 장편소설보다 청아한 단편소설이 포착하는 시적 아름다움이 있듯이, 미니시리즈를 비롯한 연속물이나 장편 영화가 갖지 못한 관점과 표현이 숨표처럼 존재하는 것이 TV 단막극 장르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관점이 단막극 장르를 설명하는 대표적 관점이 될 수는 없다. 장르를 정의하는 일은 실은 시청자의 몫이다. 결국 시청자가 깊게 공감하고 찾아주는 단막극이 그 장르에 대해 대표성을 갖게 되기에. 더욱이, 모바일로 시청환경이 변해갈수록 간결함의 가치는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잘 만든 단막극의 가치 또한 빛나지 않을까.
지금까지 관심을 갖고 보아주시고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