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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Apr 09. 2018

‘나의 아저씨’를 대하는 확증편향

미숙과 조숙

‘나의 아저씨’를 대하는 확증편향.

(6회 방송 후에 쓴 글입니다)


사람은 직관적, 감정적으로 판단을 먼저하고 그 뒤에 이성으로 판단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는다고 한다. <바른 마음 The righteous Mind>의 저자 조나단 하이트 Jonathan Haidt는 인간 마음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면서, 이성은 사실의 조합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판단을 내린 바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여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발달해 왔음을 밝힌다. 확증 편향. 자기 생각에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은 사람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논쟁과 토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끝없는 평행선 위에 서 있거나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리라.


극 예술의 창작과 비평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인간의 본성인 이러한 확증 편향을 잠시 멈춰 세우는 기제였기 때문이다.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정은 예측을 뛰어넘는 사건의 연쇄를 일으킨다. 그 연쇄 앞에서 캐릭터는 끊임 없이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짧은 직관을 넘어서는 연습을 하게 된다. 창작자의 이러한 설계에 비평은 분석으로 화답한다. 이야기의 맥락과 세부사항에 대한 분석은 극 예술의 행간으로 밀어 넣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다시 섬세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극과 비평은 우리가 직관 이상의 존재임을, 혹은 직관 이하의 존재임을 밝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본성에 끌려가지 않고 멈춰서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잠시 마음을 덥혔다면 그건 부상副賞같은 것이리라.


‘나의 아저씨’에는 직관적 판단을 끌어낼 몇 가지 기호가 잠재되어 있다. ‘개저씨’로 대표되는, 무례하고 성차별적인 한국 중년 남성을 연상케 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아저씨’. ‘나의 아저씨’를 말하는 화자가 2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이라는 것. 그녀가 40대 중반의 유부남 남성과 교감한다는 것. 이런 기호로부터 ‘40대 중년 남성을 통해 20대 여성이 구원을 받는 판타지’, 혹은 ‘40대 중년 남성이 20대 여성을 사귀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 시키는 판타지’라는 혐의가 도출된다. 현실엔 ‘개저씨’의 무례와 강압으로 고통받는 20대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많을 지니, 이 픽션은 불온하다는 판단. 확증이 서면 근거는 편향적으로 접수된다. ‘나의 아저씨’는 공격받았다. 설정만으로도 더럽고 시대착오적인 욕망을 드러냈다는 듯이. 이 픽션을 거꾸러뜨리는 것이 정의 구현이라는 듯이.


과연 그런가? 오히려 이 설정이 어떻게 확증과는 다르게 포진되고 풀려나가는지가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40대 중반의 그는 20대 초반의 그녀에게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가족과 사회가 자신에게 준 역할과 파놓은 함정에만도 버거워하는 사람이다. 20대 초반의 그녀는 그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를 저격해 자신의 삶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 심지어 40대 중년남과 20대초반 여성의 관계를 대하는 세상의 확증을 이용하여 그를 물먹이려고 까지 한다. 그녀는 절박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살인이라는 경험과 빚과 가족이라는 짐을 떠안게 된 그녀에게 다른 욕망은 사치일 뿐이다. 그러나 갈등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알게 된다. 나이와 성별 너머, 박동훈과 이지안은 각자의 고독 속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것을. 그걸 마침, 하필, 자신이 읽게 되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에서 물러설 수 없는 벼랑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이 이야기가 시대착오적 기호의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까 궁금했다. ‘나의 아저씨’는 그 기호의 이면들을 드러냈다. ‘아저씨’란 낱말 뒤에는 여전히 삶이 주는 역할이 어색하고 버거운 사람이 있다. ‘20대 초반 여성’이라는 기호의 대상은 ‘청춘의 눈부심 따위는 개나 줘버린’ 삶의 고통 속에 이를 악물고 있다. 조숙한 아이와 미숙한 어른은 슬프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조숙이 찾아온 순간의 서늘함과,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미숙한 순간의 고통을 알고 있다. 부적절한 젠더 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기호로부터 삶의 진실을 이끌어냈다면 이 이야기는 극예술이 해야 할 바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확증을 멈춰 세우고 이면을 읽어보게 하는 일.


그러나 ‘나의 아저씨’에 대한 혐오, 무관심, 오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혁명적 시대다.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무심하게, 또는 악랄하게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어 왔는가가 낱낱이 밝혀지는 시간이다. 페미니즘은 현재의 가장 뜨거운 이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여성은 이로 인해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로 인해 남성 역시 더 자유로워 질 것이다. 뜨거운 시대의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화 운동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운동이 효과적이려면 피아식별이 분명한 게 좋다. ‘나의 아저씨’의 기호와 충족하리라 예상되는 욕망의 결은, 얼핏 보면 ‘아’보다는 ‘피’에 가깝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이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며 항변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래, ‘나의 아저씨’에 예쁜 조개껍질의 가치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해일이 밀려오는데 이런 조개에 의미 부여를 할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 껍질이나 줍고 있다’ 식의 사고방식에 그동안 가장 큰 피해를 입어왔던 것이 바로 여성주의가 아니었는가. 거대 담론 아래서 젠더에 대한 문제 제기가 좌절되어온 억압의 방식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더욱이 페미니즘은 여타의 운동보다 더욱 섬세하고 어렵다. 왜냐하면 이 ‘피아식별’은 대개 가장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의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어려움이 이 운동에 내재되어 있다면, 오히려 ‘나의 아저씨’는 해일 앞의 조개 껍질이 아니라 해일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조개는 진주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도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기에, ‘나의 아저씨’에 아직 미심쩍은 부분들도 있다. 박동훈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박동훈은 과연 ‘억울갑’이기만 한 게 맞는지, 아내는 어떤 생각으로 저러고 있는지, 박동훈을 회사에서 몰아내려는 악역은 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그런 부분들이 앞으로 어떻게 풀려나갈지 궁금하다. 이 드라마의 기호가 드러내고 있다는 욕망에 대해서도 생각이 분분하다. 로맨스가 아닌 이해와 위로의 서사로 받아들이다가도, 아니 로맨스가 되는 것이 과연 나쁜가도 자문해보게 된다. 대의에 맞는 욕망만을 긍정하는 픽션은 프로파간다이지 않는가. 이해와 위로가 로맨스로 발전하게 되면 응당 그들은 픽션의 세계 안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목격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로맨스의 욕망까지 발전을 하지 않아도 좋지만, 발전한다고 해서 폐기해야 할 서사인가? 그게 극예술의 역할이 맞나?


 난 미숙과 조숙이 마주선 이야기를 본다. 미숙과 조숙이 자신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로맨스이건 삶의 정거장에 잠시 마주쳤다 갈등적으로 헤어지는 파국이건, 사람에 대한 진실을 건드려주었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하다. 드라마의 대사대로, 어떻게 사람이 한 겹이겠는가. 겹겹의 인간이 향해야 할 방향까지 멱살 잡고 끌고 가지 않더라도, 그 겹을 섬세히 드러내는 이야기 속에서 진실과 위안을 발견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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