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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Dec 05. 2018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정성, 로봇을 고전적 테마와 형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해낸.

어쩌면 해피엔딩

18.12.3 관극.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CAST: 전성우 성종완 강혜인


의외의 취향 저격.


 근미래. 헬퍼봇이라고 불리는 로봇들의 이야기다. 연기에 상당히 제약을 줄 것 같은 로봇 설정, 그리고 표현이 쉽지 않을 것 같은 SF설정. 사랑에 대한 얘기라는데 과연 감정이입이 잘 될까. 관극 전에 했던 걱정이었다. 그런데 화려한 수상 경력에 이은 앵콜 공연이라고 한다. 어떻게 풀었기에 칭찬 일색일까.


 연기에 대한 우려는 어떻게 극복되었는가. 로봇이 가진 패턴 연기는 마치 무성영화 희극 배우의 움직임 같다. 연기의 주고 받는 운동감에 살짝 과장이 섞여 행위의 의도가 더욱 정확하게 표현된다. 로봇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경직성이 아니라 마임의 경쾌한 리듬감이 주가 되어, 뮤지컬 장르에 걸맞는 춤으로 보인다.


 목소리 또한 그러하다. 패턴화된 억양은 경쾌하고 낭랑하게 템포를 올려 관객에게 노래와 대사를 전달한다. 비슷한 패턴의 대사 플레이가 이야기 안에서 다른 맥락에 놓이면서, 오히려 풍부한 서브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밝을 때의 대사 톤이 슬픈 상황에서도 그대로 밝은 억양으로 제시될 때 비극성은 배가 된다. ’바보 이야기’가 주는 감동의 원형이 있다. 모두가 세상의 거짓말을 깨우치라 말하지만 우직하고 순수하게 최초의 사랑에, 최초의 목적이 집중하는 주인공이 전해주는 감동. 걱정했던 연기 제약은 오히려 흥미와 감동의 기폭제가 된다.


 SF설정은? 처음에 배우가 천역덕스레 시연하는 로봇 연기의 패턴을 관객과 약속하면서 이 작품은 설정의 마술을 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임극을 보여주는 우화로서 이야기의 톤을 확실히 정리한다. 캐릭터를 보여주는 초반 시퀀스,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깊어짐을 묘사하는 중간의 몇몇 시퀀스들은 애니메이션 ‘up’의 오프닝 시퀀스를 연상시킨다. 동화 속에 나오는 장난감 병정의 사랑 이야기를 지켜보는 기분이 된다. 로봇, 근미래 등의 단어에서 오는 제약과 어려움을 고전적으로 푼 셈이다.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배우가 모사하여 풀어나가는 톤이랄까? 헬퍼봇이라는 설정을 이처럼 근사하게 통시적으로 풀다니.


 연상되는 이야기가 많다. 위에서 언급한 ‘UP’부터 시작해서,  ‘장난감 병정과 춤추는 소녀’, ‘토이 스토리’, ‘블레이드 러너’, ‘이터널 선샤인’, ‘ 네버렛미고’, ‘기계전사 109’,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라라랜드’, ‘A.I.’......


(UP - 관계의 진전과 변화에 대해 서정적이면서 과감하게 편집 제시한다는 점에서.

장난감 병정과 춤추는 소녀 - 사랑에 빠진 외로운 장난감들이 사랑을 성취하려 노력하는 서사에서.

토이 스토리 - 주인에게 외면당한 장난감들이 주인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과 모험에서.

블레이드 러너 - 인조인간과 진짜 인간 중 누가 더 인간적인가에 대한 고전적 질문.

이터널 선샤인 - 사랑이 파국을 맞았을 때 우리는 진짜 그 기억을 지우고자 할 것인가.

네버 렛 미고 - 존재의 목적과 무관하게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서.

기계전사 109 - 이 만화를 기억한다면... 팬심으로 넣은 작품. 블레이드 러너와 비슷한 측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사랑하는 순간의 한 절정으로서의 여행 테마에 대해서.

라라랜드 - 재즈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소재와 대화, 음악들에서, 그리고 절정 순간의 묘사.

A.I. - 부모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떠나는 인조인간의 여정)


 연상되는 작품이 많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자. 이 연상에는 불쾌한 뒷맛이 전혀 없다. 오히려 테마와 극작에 위선이나 위악을 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한 창작자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에 와닿아 찡해진다.


 그리고 그 감동에는 원형적 이야기가 있다. 버려진 아이. 소년은 소녀를 만난다. 소년에겐 버려졌어도 버릴 수 없는 삶의 소명이 있다. 되찾고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소명과 사랑이 폐기되었음을 알게된다. 소년은 존재의 이유를 잃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년은 해방된다. 그리고 그 여정을 같이 했던 소녀와의 관계에서 존재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시작이다.


 그러나 삶도 관계도 끝을 예비하고 있다. 그 끝을 가늠하게 되었을 때, 엔딩의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 주체적 이별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닥치고야 말 관계와 삶의 끝이라면 서사의 완성을 주체의 힘으로 주고자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나 주어진 삶의 목표에 순수하게 임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종종 속인다. 그리고 그 속임수에 크게 좌절했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종종 사랑이다.


 사랑은 늘 외로운 소년과 외로운 소녀가 만나는 이야기. 세상에 속고 버림받은 소년 소녀가 격렬하게 서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헬퍼봇이라는 정체성. 가장 인간다운 정체성 중 하나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는 행위’에 있다고 할 때, 이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대한 우화가 된다. 삶에는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는 소명감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사랑이 있고, 위엄있게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는 자세가 있다. 이 뮤지컬은 그 과정을 찬찬히 훑어 나간다.


 아름다운 장면들.

 음악감독의 자리에 배우가 앉아 연주를 시작하자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올리버.

메타적 순간의 지극한 아름다움. 무대의 마술.

 첫 키스와 마지막 키스의 환희와 애수.

 쏟아지는 반딧불이.


 감동의 핵심은 ‘정성’의 전달에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풍요로운 은유와 표현을 담백하게 세공한 정성에.



ps. 만석. 처음엔 관객반응이 너무 엄숙해서 빡빡한 관객들이 왔나 했다. 알고보니 대부분 팬들이어서 더욱 엄숙하게 봤던 것. 배우의 작은 무대 실수에 빵 터지는 걸 보니 냉정에 기반한 침묵이 아니라 애정과 존중에 기반한 침묵이었다. 개인적으론 초반엔 박수도 치고 웃기도 하면서 보는 게 낫지 않나 싶어 몇 번 시도했는데 분위기를 깨지 말라는 듯한 다른 관객의 기에 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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