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 이민자 Jan 20. 2019

용산참사 10주기, 공동정범

재미있다고 말할 때의 껄끄러움에 대하여.


 내게 2018년 최고의 영화는 <공동정범>이었다.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라면 응당 예상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억압자와 피억압자,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발, 구조 안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이런 모습들을 사회 고발성 다큐멘터리에서 기대하게 된다면 <공동정범>은 그 모든 걸 한참 넘어섰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남겨진 사람들의 말과 관계에 차분하게 또 솔직하게 집중하는 가운데, 피억압자로 뭉뚱그려진 사람들 사이의 다채로운 관계 지도가 성격의 반전과 함께 떠오른다. 마음 먹고 허구의 극 예술로 구성해도 힘든 목표를, 실제에 대한 차분한 응시로부터 이루어냈다는 점은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더욱이 소재로 삼은 사건과 실제 등장인물들이 현재도 미래도 지고가야할 무게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 다큐의 연출가들이 그 책임과 무게를 통감하고 가능한 한 나눠지고 가려한다는 믿음이 피해 당사자인 출연자들에게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 대해 좋은 후기를 남기고 싶어 SNS에 ‘영화로써 재미있다’고 썼다. 실제로 매우 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미와 깊이에 대해 경탄할 사람들은 많을테니, 재미에 대해서도 보증하는 감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라는 문화상품으로 시장에 나온 이상, 시장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이 이 영화를 위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장에서의 성과가 이 영화가 가진 문제 의식을 확산시키고, 더 나아가 문제 해결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용산참사 10주기라는 기사 제목을 읽다 문득 그 때의 생각이 살짝 껄끄럽게 떠올랐다. 이 영화를 ‘잘 팔릴 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이다.’라는 맥락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했을까. 이 재미의 대상은 허구의 캐릭터가 아니라 참사의 당사자들, 나와 같은 공간에서 몸과 기억에 이 사회적 참사를 새기고 살아갈 시민들이다. 다큐멘터리가 그 사연을 예술적으로 뛰어나게 담아냈다고 하여, ‘많이 소비합시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따지고 보면 그 말이 그 말이다. 이 영화 많이 봅시다. 왜? 의미 있으니까. 재미도 있으니까. 그 모두를 갖춘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길 바라는 건 그냥 순수한 거다. 내가 스스로를 의심한다면, 이 영화를 어렵게 만들어 내고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하기 위해 홍보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의구심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를 비롯한 픽션의 재미란 종종 현실을 잊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 빠져 자신을 잊을 때 느껴진다. 등장인물에 푹 빠져 정교하게 구성된 이야기 속에서 노니는 거다. 그리고 ‘재미있었다’고 표현하며 일상과 삶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잘 만든 다큐멘터리, 특히 우리가 사는 바로 이 땅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재미있을수록 이야기에서 관객을 꺼내 현실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목표이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재미있었다고 표현하면, 다큐멘터리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현실을 잊고 푹 빠져 즐길만하다’고 얘기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공동정범>은 가상의 캐릭터와 상황이라고 보고 받아들여도 무방할만큼 위태로운 갈등의 순간들과, 입체적이고 앞으로의 변화가 궁금한 캐릭터들과, 관계와 사건의 반전들이 들어 차 있었다. 정말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재미 끝에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덮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현실에 대해 짤막한 영화 리뷰를 남기는 정도의 실천을 보였다. 무거운 현실에 대한 영화 소비자의 소극적 반응. 측정하기 힘든 고통의 무게를 재미있는 영화 소비의 가벼움으로 치환하는 일에 대한 의구심.


 그런데 허구의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재미가 가장 묵직할 때는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할 때다. 그리고 인간의 진실에 대해 되물을 때다. 다큐멘터리건 픽션이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이야기의 맥락 속으로 데려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정범>은 용산참사를 지나간 기억 속의 뉴스 표제로서가 아니라,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공동체의 일원에게 일어난 일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사건을 마주쳤을 때, 인간과 소집단은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를 숨죽여 경험하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린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두려움, 죄책감, 배신감, 고통과 슬픔. 그걸 먼저 느낀 사람들.  그 공감을 겪는 동안 우린 이야기의 맥락에 푹 빠져 스스로의 현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재미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망각은 공감대의 확장을 위한 망각이다. 현실 외면의 망각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 범위는 제한적이다. 어찌보면 제한적 공감능력이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근원적인 기능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고통을 내 것처럼 공감한다면 곧바로 무너지지 않을 인간이 어디있으랴. 하지만 이야기 형식은 사람을 무너지지 않게끔 지탱하며 공감대를 넓혀 더 넓은 감각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다. <공동정범>이 품은 이야기는 제발 내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만한 참극을 바탕으로 한다. 외면하고 싶은 강렬한 고통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구성한 이야기의 맥락엔 그 고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발견과 교감이 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고 난 후, 보기 전의 나와는 살짝 달라져 있다. 더 이해했기 때문에 조금 더 부드럽게,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했기에 조금 더 단단하게.

 

  그래서 다시 얘기할 수밖에.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공동정범>을 ‘문화상품’이라는 카테고리에 수납하고 시장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일은 좀 어색하긴 하지만, 그 어색한 만남이야 말로 인간이 자신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만들어놓은 통로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정치적 해석, 구조적 모순, 법과 처벌 등등의 세계 아래로 더 깊게 들어가, 인간의 이야기로 만날 수 있게 예비해놓은 접점. 10주기를 맞은 용산참사가 참극을 넘어 사회 공동체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 있다면 이 영화의 존재도 그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개인과 소집단 안에서 밀봉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세한 결이 다큐멘터리로 기록되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면, 우린 경건해진다. 넓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좁게는 그러한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있던 인물들이 행복한 미래를 꾸려가기를 역시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하게 된다. 


 <공동정범>은 12000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내가 느낀 재미에 비해 너무 소박한 확산성이었다. 이 영화의 ‘재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용산 참사에 대한 무례는 아닐 것이다. 그 재미는 고통의 노출에 따른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성실한 기록으로부터 나오는 송곳같은 질문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사를 일으키는, 저항하다 고통으로 추락하는, 그 이후를 견디고 버텨내는,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껄끄러움의 한 바퀴를 돌아 나선 계단의 다음 층에 도착한 심정으로 또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재미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