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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제작기 7 - 배우들

액자가 된 소녀

by 행복한 이민자

5. 하나 둘 모여서.
<액자가 된 소녀>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 된 사람은 진경 선배다. <참 좋은 시절> 마지막 야외 촬영 때 촬영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인사드렸다. 때마침 시네21에서 진경 선배가 요청해 오순택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 기사가 있었다. <미네티>와 선생님의 연기 인생에 대한 인터뷰였다. 뒤늦게 알았지만 진경 선배는 나의 연극원 선배이자 오 선생님의 제자였다. 매우 안 좋은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진경 선배는 대본도 보기 전에 흔쾌히 출연을 수락했다. 그리고 내게 염려를 전했다.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괜찮겠어요? 글쎄, 어떨까요 선배님? 휴... 그래도 선생님이라면...



캐스트 중에 선생님의 제자가 많다. 상림 아버지 역 이종무 선배, 의사 역 이화룡 선배, 마트 아줌마 역 양세윤 선배, 은행 여직원 역 박현정 씨, 은행 남직원 역 정태민 선배, 상인 역 김승언 선배 등. 특히 박현정, 양세윤, 정태민, 이 세 분은 선생님을 직접 챙기는 역할을 맡아 고생이 가장 많았다. 대본 리딩을 위해 한 번 집을 나서기 위해서도 제자들의 수발이 필요했으니까.

정인기 선배도 일찌감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KBS단막극에 심심찮게 얼굴을 비추셨던 분이지만 워낙 찾는 데가 많은 바쁜 분이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일찌감치 출연을 수락하고 기다려주셨다.


서영화 선배는 오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는 아니지만 선생님을 잘 알고 있었고, 내 연극원 선배이기도 하면서 내가 학생 때 참여했던 작품에서 배우로 만난 경우였다. 서영화 선배와 종종 서로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연출로서는 꼭 캐스팅 요청으로 연락을 취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연락을 하는 데에 8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서영화 선배는 작업을 잠시 중단할 생각이었다고 출연을 고사하려고 했다. 특히 드라마는 더더욱 자신 없으시다며. 서영화 선배는 깊은 목소리와 눈매, 그리고 정갈한 느낌 덕에 보통 '진심으로 서럽게 우는 착한 사람' 역을 많이 맡았다. 나는 선배에게 '악역'을 주고 싶었다. 무정한 세상을 대표하는 캐릭터로서의 선생 역. 이런 저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자 서영화 선배도 결국 웃으며 출연을 약속했다.


이재균 씨는 2013년 연극무대에서 발견한 보물이다. 2013년 상반기 연강홀에서 했던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연극에서 포스너 역을 맡았다. 정갈한 고등학생 역이었다. 큰 액션 없이도 가만히 지켜보고 집중하고 표현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영상 연기 경험이랄 게 없었고, 소속사도 이제 갓 생긴 참이었다. 가뜩이나 오 선생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처음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과 신인 남자 배우라면 연출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 두 번 미팅을 가졌고, 두 번째 미팅에 이재균 씨는 극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은 편지를 가져왔다. 연필로 쓴 손편지에는 대본과 인물 분석에 대한 메모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이 배역은 이 친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서로를 한 번 믿어보자.


결과는? 이재균은 신인연출자로서의 부담을 오히려 크게 줄여주었다. 우리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연극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의 빌리 역으로 동아연극상 남자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재균이 큰 배우가 돼서 그 팬클럽도 크게 성장하면, 내가 받은 편지를 합의 하에 경매에 붙여 좋은 일에 쓸까 싶다. 아, 그 때가 되면 그 편지를 꼭 가지고 있고 싶을 수도.

정인선 씨는 영화 <한공주>를 보고 기억해둔 경우였다. 이 드라마의 특성 상 세영이는 출연분량의 대부분이 '액자 속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틸 사진으로서의 전달력과 대사 전달의 정확함이 필수다. 정인선 씨의 눈매는 독보적이다. 길 잃은 강아지 마냥 처연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든다. 아역부터 연기를 해온지라 대사 전달력도 좋았다. 드라마 내내 등장했던 액자의 사진이 정인선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캐스팅이 된 직후 당부한 것은 액자만 나오는 씬에도 현장에 있어달라는 것이었다. 성택의 감정선은 이 액자 자체가 바로 손녀의 현신이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믿어야만 나올 수 있는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정인선 씨가 캐릭터로서 현장에 있느냐 없느냐는 연기에 큰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인선은 거의 모든 현장을 지켰고 덕분에 연기의 사실감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이세은 씨는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같이 한 적이 있다. 세영 어머니 역할이 간단한 이미지만으로도 존재감이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특별출연을 요청했다. 우리 촬영 스케줄이 요동치는 바람에 특별출연치고 고생이 많았다.

교장 선생님 역으로 연극배우 이상구 씨를 모셨다. 간단한 씬이긴 했으나, 조연출 때 4부작 <아들을 위하여>에서 북파공작원 선배 역할을 1씬으로 풍취를 남겨주신 적이 있어 부탁을 드렸다. 묘한 느낌이 있는 배우라 출연 씬에서 성택이 더 궁지에 몰리는 느낌을 주기 위함이었다.

캐스팅의 이유가 없는 캐릭터는 아무도 없다. 신부 정현석, 학생 고보결, 최나무, 오희준 등도 과거에 같이 했던 경험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이다. 캐스팅 디렉터의 추천으로 만난 배우들도 고심을 거쳤다. <액자가 된 소녀>는 대체로 배역에 넘치는 배우들이 모인 작품이었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