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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Jan 31. 2020

[연극] 최고의 갈매기, 챠이카.

챠이카(갈매기, 작 안톤 체홉/ 연출 전훈)

연극 <챠이카> (갈매기)

안똔 체홉 극장, 2020. 1. 28. 화.

전훈 연출/ 출연 김진근 가득희 염인섭 이음 최지훈 장정인 정인범 조한나 조경미 이주환 권대현 박인혜


 삶이 힘들고 덧없다는 이야기를 힘들게 들려준다.  체홉 작품에 대한 그간의 인상이었다. 체홉 연극은 지루하거나 감정적으로 지치거나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워낙 훌륭한 고전이고 그간 보아온 프로덕션들도 대체로 유능한 사람들의 것이었기에 탓할 것은 나의 식견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게 된 <챠이카>를 통해 비로소, 이 버전의 체홉을 보기 위해 그동안 체홉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서도 보아온 것은 아닌가 싶다.

 <챠이카>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가질 수 없거나 가져선 안 되는 것을 욕망한다. 등장인물들은 현재의 삶에 대한 불안과 불만에 가득 차 있고, 그 감정은 결국 타인에 대한 욕망으로 발현된다. 인습에 의해서건 매력의 차이에 의해서건,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는 일로 욕망이 수렴되는 것이다. 불안, 불만에서 사랑과 집착으로 오가는 감정의 격랑은 이 극의 핵심 중의 하나다. 배우들의 연기에서 그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극에 숨죽여 빨려 들게 된다. ‘갈매기’를 소극장에서 보니 배우들의 표정에서 감정의 디테일이 느껴지는 것이 무척 좋았다. 이 극의 인물들은 대부분 자기 연민을 품고 있는데, 연기적 측면에서 자기 연민을 표현하는 일은 독이 되기 쉽다. 중극장이나 대극장에선 배우들의 표정이 잘 보이질 않으니, 캐릭터가 원래 갖고 있는 자기 연민이 그대로 배우의 연기로 느껴져서 관극의 맥이 빠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소극장 환경에선 순간순간의 분노, 불안, 열망, 의혹 등을 오가는 배우들의 돌파 방식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1막은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자기 이미지가 엇갈리는 모양새가 블랙코미디로 연출된다. 불만과 집착이 있는 캐릭터만큼 근사한 코미디의 소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등장인물들은 더 없이 진지한데 보는 사람 입장에선 실소가 터진다. 실소 끝에 조금 조신해 지는데, 나 또한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는 신랄한 반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인물들에게 거리를 유지하며 웃음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 작품은 그와 동시에 모든 인물에게 감정이입의 여지 또한 열어준다. 시작하는 작가인 꼬스챠의 순수와 고통, 시작하는 배우인 니나의 호기심과 열망, 등장인물 중 최고의 알파 메일이자 문제적 남자인 뜨리고린의 공허와 집착, 아르까지나의 강함 뒤에 숨은 불안, 뽈리나와 마샤의 탈주에의 열망....... 등장인물들을 이해하지만 편들지 않는 극작과 연출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섣부른 휴머니스트는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고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 편을 들곤 하는데, 이게 반복되다 보면 인정받기 위해 이해에 앞서 편을 먼저 들고 있음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편을 든다는 건 적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어설픈 휴머니스트는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새에 무수히 적을 만들고 문득 언제 이렇게 고립이 됐는지 놀란다. 그리고 허겁지겁 자기의 편을 찾는데, 그제서야 자신이 이해도 부족했음을 깨닫게 된다. 감정의 진영논리가 파놓는 함정이랄까. 이해하되 편들지 않는 태도는 연출에 있어서나 자기 자신을 대할 때에도 정신의 정수와도 같은 태도다. 그 균형감각을 어떻게 현실화 시키는가가 삶과 극의 숙제일 것이다.


둘째 문단에서  ‘거의 대부분’에 따옴표를 친 이유는 ‘도른’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사람은 유일하게 불안에 떨지도 않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고, 권력을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타인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자존감이 가장 높다. 자신의 존재를 다른 걸 통해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심드렁하고 냉정한 도른 덕분에 다른 인물들의 정신적 나약함이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에게는 별다른 인간적인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도 사교는 필요한 것이라 이 인물들과 나름 어울려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의 심드렁함과 냉정함은 그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대사를 읊을 때 드디어 힘이 실린다. 그는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해하고 있었고, 편들지 않고 있었기에 그의 마지막 말과 판단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뜨리고린와 꼬스챠는 작가의 두 페르소나로 느껴진다. 뜨리고린은 스스로의 애매한 성공을 자조한다. 그럭저럭 괜찮은 작가였으나 똘스또이에겐 한참 못미치는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뭐. 허나 그 정도의 성공으로도 그를 선망하는 니나에게 그는 포식자다. 니나와의 로맨스는 젊어 고생에 대한 보상 심리라며 현재의 연인인 아르까지나에게 (심지어 직접!) 항변하기도 한다. 그는 언젠가 써먹을 생각에 메모하느라 바빠 현재의 삶에 몰입하지 못하며, 감정적 갈증을 해소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그는 관계에서 포식자가 됨으로써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나, 그러한 자신의 모습까지 전체적으로 이해받기 전엔 결코 이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아르까지나를 떠날 수 없는 이유다.


꼬스챠 역시 결국엔 성공한 작가가 되었으나 그건 그의 삶에서 돌파구가 되지 못한다. 이거야? 겨우 이런 감정이야? 아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걸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거야?  그에겐 그렇게 증오하던 뜨리고린처럼 되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망이 엄습했을 것이다. 결핍은 욕망을 불러오지만 욕망의 충족이 결핍을 해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린 욕망을 향하는 과정 위에 있지 않으면 종종 삶의 맥락을 잃고 방황한다. 그래서 가짜 욕망에 속고 절실하게 매달린다. 젊을 때는 이게 청춘의 필요악 같은 과정이라 생각한다. 곧 나의 결핍도, 진짜 욕망도 알게 될 거야.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린 끝까지 잘 모른다. 우리가 알게 되는 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가짜 욕망이라는 걸 알고도 그냥 속아 준다는 것이다. 삶에 어떤 맥락이라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최소한의 에너지를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가짜 욕망에 속은 척 한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와 이별한다.


 아르까지나는 이 극을 블랙코미디이자 비극 두 가지 장르를 오가게 하는 데에 핵심적인 인물이다. 늙어가는 여배우 클리셰에 빠지기 쉬운 캐릭터인데, 나르시시즘보다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에 집중하며 그 위험을 돌파한다. 이 인물은, 그리고 이 배우의 연기는 극의 톤을 설정한다. 늙어가는 여배우라면 보통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고 떠받들리는 데에 익숙하며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고 불안에 떠는 인물로 생각되고, 그렇게 표현되기 쉽다. 하지만 이 <챠이카>의 아르까지나는 이 극에 등장하는 누구보다 관계나 욕망, 도시의 삶에 대한 경험치가 많다. 또한 자신을 사회적으로 연출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나르시시즘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허세나 어긋난 욕망에 대해 적절한 타이밍에 짧게 냉소를 던질 줄 아는 통찰과 유머가 있다. 극에서 가장 강렬한 두 개의 대결 씬이 있는데, 하나는 아르까지나와 꼬스챠의 씬이고 다른 하나는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의 씬이다. 작가의 두 분신은 아르까지나의 솔직함에 의해 큰 변화의 고비를 넘는다. 이 극이 누구의 편도 들고 있지 않음에도 아르까지나는 일견 보이는 것과는 달리, 삶에 있어 용기 있는 개척자이며 뜨겁고 현명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결국 삶의 함정에 무릎 꿇게 될 막 후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배경 설정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시골 마을. 인물들은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적막한 밤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 것인가. 산만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산만할 수 있는 각종 미디어로 가득찬 현대 기준으로는 실감하기 힘들만큼 고독의 시간이 길었을 것이다. 고독과 두려움이 모든 인물들의 기저에 깔려있다. 어떻게든 의미를 추구하거나 변화하고자 하지만 쉽사리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망없는 사랑만이 정신의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환경은 사람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갈매기의 주인공들도 시골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다를 수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체홉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마을을 떠난 니나에 대한 냉정한 묘사나, 도시와 마을을 오가는 뜨리고린과 아르까지나도  별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진정 환경을 바꿨던 것일까? 그들은 떠났지만 준거집단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니나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전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고 사회적으로 평가 절하 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뜨리고린과 아르까지나는 시골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 받는 데에 익숙하다.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시골 마을의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와 갈망, 두려움에서도 도망치지 못한다. 사는 곳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작가로 성공함으로써 사회적 존재감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 꼬스챠도 고통이 더 깊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를 해나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이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는 없었던 걸까?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작은 변화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순 없었던 것일까? 그런 인물이 두 사람 있다. 영지 관리인 샤므라예프와 중학선생 메드베젠꼬. 샤므라예프는 영지관리인으로서의 권한과 가장의 권위에 만족하고 집착한다. 자기 영역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다. 중학선생 메드배젠꼬는 촌스럽고 불만 많은 1막을 지나, 원하던 마샤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2막에선 모든 걸 다 이룬 느낌이다. 둘은 장인과 사위 관계인데, 둘 다 아내의 정신적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두 사람 또한 하나의 영혼을 다른 세대로 나눈 듯하다. 샤므라예프는 나르시시즘에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눈치 없이 혼자 반복하고 웃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권위적 남자이며, 메드베젠꼬는 지루한 삶을 버텨내는 자기야 말로 소설의 주인공 감이라며 자기 연민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관심 있는 것 이외의 말과 표정은 읽지 못한다. 둘은 주변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또 한 명, 퇴임 법무관 쏘린은 아르까지나의 오빠로 모든 걸 좋게좋게 해석하려는 노인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삶에 후회와 집착을 보인다.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서 샤므라예프와 메드베젠꼬의 미래일 것이다.


 행복감을 누리는 인물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종국에는 후회하게 될 것이고, 고통 속에 빠진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관계를 추구하지만 파멸을 맞는다. 정말 염세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난 니나에게서 희망을 본다. 니나는 전통적 서사 속 전형적 희생양이다.  도시의 화려함을 동경한 처녀가 귄위있는 중년 남성을 사랑했지만 이용당하고 자식도 낳지만 바로 잃는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신통찮다. 과거 자신을 흠모했던 코스챠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경멸당할까봐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그녀가 뜨리고린에게서 받은 신탁. ‘너는 갈매기... 파멸할 것이다.’ 그녀는 파멸한 듯 보인다. 1막의 흰옷에 대비되는 2막의 검은 옷과 스모키 화장은 더욱 그런 인상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누가 파멸하지 않는가. 모두가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또 인간으로서 파산한다. 혹은 파멸을 예비하고 있다. 하지만 니나는 최소한 시도를 했다. 후회를 딛고 다음 생을 다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혼의 준거집단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과 변화로 다시금 자신을 밀어넣을 수 있다면 그녀에겐 또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그녀만이 파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바닥까지 절망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스챠보다 더욱.

 좋은  연기였다. 훌륭한 연출이었다. ‘프로페셔널한 아마추어리즘’을 목격한 기분이다. 돈이 되는 프로덕션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이야기의 본령을 이 보다 더 잘 전달해준 체홉을 난 보지 못했다. 소극장에서 135분간 12명의 배우가 뿜는 열기는 블럭버스터의 화려함도 뛰어 넘었다. 가장 비중이 작았던 야코프와 하인까지도 자기 색을 가지고 극을 풍요롭게 했다. 행복한 관극이었다.


ps. 체홉이 의학부 출신이었다니, 심드렁한 도른이야말로 그의 진짜 페르소나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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