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시대.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
주인공이 이야기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날 때 몰입감이 커진다. 삶은 영원히 바뀌었고, 이제 새로운 생에 맞서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에서는 주인공과 그 주변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기도 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 인공지능 운영체제는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발전 단계를 지나 그들끼리 집합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인간은 뒤에 남겨져 서로를 조심스레 보듬는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arrival). 외계인의 언어는 인간의 것보다 한 차원 위의 것이다. 시간 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언어. 그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주인공 또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인지를 갖게 된다. 두 영화는 그 즈음에서 끝나지만 그 후로 인류와 세계는 영원히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가 끝난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펼쳐질 지 예측하기 어렵다. 모든 게 변할테니까. 믿어왔던 가치와 인식 모두.
2020년 봄, 지금이 바로 그 분기점은 아닐까. 가치가 뒤집혔다. 지금까지 연결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었다. 홀로 고립되지 말고 타인과 연결되면 문제의 돌파구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고, 뜻을 나눈다. 집회 결사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자유다. 모일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다. 반면 고립은 통제와 독재의 상징이었다. 노동조합을 깨는 일도 참여 개인들의 이해가 다르다는 걸 부각하며 이간질을 통해 고립시키는 것으로 출발한다. 모이지 못하면 조직과 권력에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독재는 모임을 경계한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오프닝 씬은 아일랜드 마을 주민들의 축구시합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조차 폭력적으로 금지 당한다. 이에 관객도 같이 분노를 느낀다. 고립을 피할 것. 세상과 타인과 연결될 것. 귀찮고 힘들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치.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로 이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치가 되었다. 모이지 않는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안전을 위한 최선이다. 바이러스는 독재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사람을 고립시킨다.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도 두렵지만 내가 감염원이 되어 가족을 포함하여 타인에게 병을 전파하는 숙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더 공포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좀비의 법칙. 같이 있는 것은 위험하다. 연결은 위험하다.
‘손에 손 잡고’. 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제목. 지구촌을 향해 가는 인류의 대화합을 칭송하는 노래. 바이러스는 손에서 손으로 전염이 되기에 악수도 삼가고 엘레베이터 버튼 조차 팔꿈치로 누르는 지금 시점에 듣기에 불편한 제목이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는다는 것이 신뢰와 호의의 징표가 아니라 질병과 위험의 징표가 되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늘어나는 확진자와 사망자 도표를 계속 숫자로 보고있자면 현실감이 사라지고 마치 올림픽 메달 경쟁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처럼 세계가 하나의 관심사로 국가적 행동을 촉구하고 세계인과 공유한 때가 있던가. 바이러스는 개인들을 고립시키지만, 그 고립감 자체를 전 세계인이 공유하게 되었다. 고립의 연대, 신체의 연결이 배제된 감정의 연결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해도 우리는 오프라인을 ‘진정한 것’으로 여겼다. 온라인 싸움도 격렬해지면 ‘현피’를 뜨지 않나.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다 같이 극장에서 울고 웃고, 몸을 부대끼며 운동을 하고, 여행을 떠나 가보지 않은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위험하다. 더불어,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생계를 걸었던 사람들은 더더욱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늘어나는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료진과 함께.
만나지 마라, 같이 먹지 마라, 모이지 마라, 체육관 같은 다중 이용 시설에서 같이 운동하지 마라, 동선을 넓히지 말고 가능한 집에 있어라. 지금 요청받는 가치들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장려받는 행동이 아니었다. 질병의 확산을 땔깜 삼아 가치관이 뒤집힌 것이다.
지금이 단지 임시적인 상황일까? 사람의 본성이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여전히 오프라인을 좋아하겠지만, 오프라인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문화적으로 내재화할 것이다. 이것이 손을 자주 씻고 소독 개념을 대중화하는 수준이라면 다행이다. 개인들의 고립이 긍정적으로 여겨진다면? 웹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대면 접촉은 동거 가족에 국한된다면? 그래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개인을 흩어 놓는 건 언제나 권력의 염원이라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선 전체주의적 통제가 어느 정도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동원력은 유사 시에 공동체를 보호하는 능력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이 지금껏 수 세대를 거쳐 수많은 희생을 통해 획득해온 자유와 인권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또, 온라인으로 접하는 인간은 데이터로 인식된다는 점이 걸린다. 육체성을 소거한 타인과의 소통은 주관적으로는 가상 현실과 비슷하다. 오프라인을 원본으로 구축된 온라인은 이제 스스로 원본이 된다. 우리는 타인이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 자신이 타인에게 데이터일 뿐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영화, 드라마, 소설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에는 부끄러움이 따랐다. 현실을 떠나 고립된 개인의 시간에 접하는 픽션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반 쪽짜리이지 않을까, 하는 부끄러움. 그래서 늘 발이 땅에 붙어있음을 느끼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부끄러움이나 실제에 대한 추구 자체가 촌스럽고 불필요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립 자체가 자신과 공동체의 안전에 기여한다지 않나. 고립된 채로, 매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영향을 미치는 건 이제 그냥 기본이다. 그리고 우린 실제와의 연결성을 검증해야 한다거나, 연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지금 믿고 싶은 것을 더 강하게 믿는다. 알고리듬의 추천을 축복삼아.
바이러스 시대를 겪고 난 인간은 또 어떤 추구를 갖게 될까. ‘손에 손 잡는’ 연대를 아름다운 가치로 여겼던 신화가 깨지고 난 후의 사람은 가상 공간에 무엇을 더 바라게 될까. 지극한 가상 현실로서 모니터로 제공되는 픽션을 만들지만, 그 제조 공정은 지독하게 육체적인 산업에서 일하는 나는, 앞으론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아니 무엇보다, 우리는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공포와의 동거는 결국 종식될 수 없는 운명일까. 1993년 환경보호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 두 번째 앨범에서 이승환이 노래한다. ‘지금 미래가 시작되고 있다’.